나,술,여 -1.옥희배상 안 또 다른이야기의 시작.

윤서의 친구 지혜이야기

by 이규만

-1.옥희배상 -1 -8


곧 집을 나왔다. 학교 부근에 자취방을 얻어 지내는 지혜가 내 형편을 딱하게 여기고 몇 번씩이나 나를 찾아와 주었다. 어차피 혼자 쓰려던 방이었어. 방도 넓으니 너희 집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어. 엄마도 지혜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거 같았고 무엇보다 종찬이가 내게 미칠 영향들을 짐짓 예상하는 투였다.

-그래도 거기가 좀 멀지만, 지혜 말대로 학교에 다니는 것에 집중하려면 집보다야 훨씬 나을 거 같아. 그렇게 해. 윤서야. 그래도 가끔은 집에 들러서 엄마한테는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는 해줘야 해. 알았지?

지혜는 대학교 입학식에서 처음 만난 친구였다. 입학식 당일, 대학 운동장에서 나란히 섰을 때 같은 학과라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상통하는 면이 많았다. 본의 아니게 내 형편까지 털어놓았다. 지혜가 바로 구안(具案)을 내놓았다. 마침 학교 주위로 방을 얻었어. 같이 지내자. 어쩔까 망설이면서 눈치를 많이 봤었다. 지혜는 친근감이 넘쳐흘렀다. 나하고 이야기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선뜻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거였다. 그런데도 지혜는 방세를 요구한다거나 같이 쓰는데 필요한 어떠한 조건도 달지 않았다. 같이 지내자니까. 어쨌거나 방주인은 지혜였고 그녀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혜 엄마가 나랑 같이 자취방을 쓰는 것에 대해 여간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내 인상이 좋아서 그랬는지 알 길은 없었다. 아마도 방안이 온통 책이 빼곡히 널려 있어 공부하는 분위기가 제대로 잡혀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혜 엄마는 극성이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찾아왔다. 그래도 공부하려면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여자 둘이 지내면서 냉장고 안이 이게 뭐니. 음식물 쓰레기는 빨리 갖다버려야지. 저렇게 놔두면 냄새난다고. 지혜 어머니가 오게 되면 집에 온통 시끄러웠다. 그녀가 언제 갈지 몰랐다. 약속이 있어요. 슬쩍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수였다. 딸내미가 자취한다, 관심이 많은 것은 알지만 옆에서 시시콜콜 있는 그대로 잔소리하는데 도무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나보다 형편이 훨씬 나은 지혜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따로국밥처럼 자취방에서 같이 지내고 그에 부합한 혜택만 누리는 것조차 영광으로 알아야 할 일이었다.






매치 컷 match cut

비, 냄새, 빨간.–지혜 이야기


수학과가 전공이지만 미적분이 약하다 보니 학점 이수를 위해 부전공으로 정치외교학부를 택했다.

1학기 중간고사도 얼마 남지 않은 때고 수업에 몰입해야 할 시기였지만 그에 대한 중압감이 심적으로 몰리니까 외곬으로 치우쳤다. 지독하게 따분하기 그지없을 즈음이었다. 교수 말이 자꾸 강의안 구석 쪽 파장으로 떨렸다. 전공이랑 연계가 없는 이런 정치학을 공부해야 하나. 교양과목이라면 모를까. 차라리 이런 지루한 내용을 듣는 것보다 이공계 쪽이 나을 뻔했어. 잘못 선택했어. 졸음이 엄습했다. 억지로 고개를 틀어 목을 돌렸다.

처음에 몰랐지만, 과에 남자가 새로 한 명 보였다. 학기 초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편입해 온 건가. 나처럼 부전공인가. 남자가 급작스레 부상했다. 수업 시간에 교수에게 질문할 때 그가 눈에 들었다. 남자에게 매료되는 시간은 불과 채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남자 키가 훤칠한 데다,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하며, 목소리며 말하는 투가 내가 좋아하는 특정 배우를 많이 닮았다. 앞에서 보면 한석규인데 옆으로 보면 짝퉁 정성호로 비껴갔다. 그래도 한석규 쪽에 무게를 더 실었다.

바야흐로, 수업 시간이 그에게만 몰렸다. 잠깐이라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렸다. 그도 날 기억할까. 그는 항상 도서관이나 점심 시각에 학교 식당, 혹은 정치외교학과 강의 시간에는 빠지지 않고 볼 수 있었지만 다른 외적인 공간에서 그를 보기는 어려웠다. 과별 모임이 끝나고 우르르 몰려간 시끌벅적한 술집에는 전혀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면 아쉬웠다. 공부하는 이들끼리 좀 더 가까이 어울렸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학교보다야 밖에서 보는 경우가 훨씬 사적일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많기 때문이었다.

그가 혼자 주변 상가를 다니는 것은 몇 번 본적은 있다. 그렇지만 학교 부근 카페나 술집에서 그와 마주치기가 정말 힘들었다. 아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에게 다가서고 싶었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말 걸기도 껄끄러운 상태였다가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이루어진 것은 뜻밖에도 스터디그룹 모임에 같이 참여할 때부터였다. 모집할 때만 해도 그가 스터디그룹에 끼는 구성원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의외였다. 사람들 앞에 나대지 않는 고지식한 스타일 줄만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다. 스터디그룹은 딱 다섯 명뿐이었는데 나와 그를 포함하여 여자 셋에 남자 둘이었다. 거기서도 말도 한마디 못 붙이고 소개 때 그의 이름만 겨우 안 상태였다. 고 명수. 책상 너머로 그를 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를 생각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가까워져서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 볼까. 그가 말을 하다가도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면 의식했는지 책상 위에 교재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또 눈이 맞으면 그도 싫은 기색은 아닌 것 같았는데 무표정이었다. 차라리 이럴 땐 정치 외교에 관한 공부보다는 관상학이나 심리학책을 뒤져보는 것이 더 내게는 현명할 것 같았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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