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 붉은 저녁 개정판
엄마는 나와 종찬을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식모에 식당 종업원에, 양말 공장도 다니고 심지어 옷 보따리장수까지. 그때마다 지쳐 있는 엄마를 대하기가 힘들었다. 너희들 때문에 여자로서는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사는 것이 고달프다. 꼭 그 말이 나와 종찬이, 그 때문에 빚어진 삶의 짐으로 무겁고 버거운 회한으로 느껴져 부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한테 되도록 딸로서 입고 있는 최대한의 수혜를 보답하고 싶었다. 공부만이 내가 유일하게 엄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혼자서 고생하는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위안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늘 성적표를 엄마한테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엄마는 웃었다. 윤서 성적표만 보면 신나. 식당에서 주인이 다그치고 힘들게 해도, 밤늦게까지 일해도 윤서. 네 생각만 하면 힘이나. 내가 너 때문에 산다. 눈물이 났다. 성적표를 들고 엄마를 안아주었다. 엄마. 행복해. 나도 엄마 때문에 살아. 알지?
그런데 대학을 진학하고부터가 시련이었다. 등록금이 발목을 붙들었다. 일단 합격만 해놓고 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아르바이트하면 될 거야. 더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탈 수 있을지 몰라. 지나고 보니 아니었다. 대학 생활을 편하게만 누리려던 편협함이 궁지로 몰았다.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절차만 밟다 보니 계속 헤매는 경우였다. 걱정만 앞섰다.
엄마는 내 대학 생활에 필요한 육백만 원이 넘는 등록금과 그 외에 들어갈 부수비용을 대줄 형편이 아니었다. 우선 전세금을 빼서 그 돈으로 해결해 보자. 윤서야. 엄마는 시무룩하게 있는 나를 달랬다. 나도 나이지만 당장 종찬이가 문제였다. 방 빼게 되면 단칸방으로 나앉게 되는데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종찬이가 어떻게 나올지는 안 봐도 훤했다. 방만 빼 봐. 따로 나가 자취할 거야. 종찬이는 억지 아닌 억지를 부렸다. 이제 반항기에 접어든 종찬이를 감당해 내기에 엄마와 나는 힘에 부쳤다.
잠시나마 잊고 살았던 아빠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나서 너무 힘들었다. 종찬이는 불같은 아빠의 성격을 꼭 빼닮았다.
-조금만 참자. 종찬아. 누나 학교 다녀야지.
엄마가 말하자마자 책과 사물을 모두 뒤집어엎고 난리를 피웠다. 누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 지내야 한다니. 말도 안 돼. 엄마는 종찬이를 말리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맞았고 그대로 꺽꺽 넘어가고 말았다. 그 불같은 성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엄마는 놀랐는지 몸을 사시나무같이 떨었다. 내가 종찬을 말리면 더 화를 돋우게 될까 봐 소리칠 엄두도 못 냈다. 나도 엄마처럼 너무 놀라 울먹였다. 엄마를 꼭 안았다. 엄마의 눈가가 빨개져서 눈물 고인 모습이 가여웠다.
-종찬아. 그러지 마. 엄마가 너무 불쌍하잖아.
-사는 것이 이 모양인데 대학이 무슨 소용이야? 누나! 그 잘난 대학이 뭐 그리 대단해? 때려치워!
-그래 종찬아. 대학이 무슨 소용이야. 사는 것이 이런데. 엄마도 저렇게 힘든데.
며칠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종찬이는 수없이 엄마한테 대들었다. 밤늦게까지 식당 일을 하고 온 엄마 얼굴을 대하면 첫마디가 그랬다. 집 나갈 거야. 마침내 엄마는 옷장 서랍에 있던 통장까지 꺼내, 보여줬다. 만기가 이년이 남아있는 적금까지 해약했어. 그게 뭐. 그게 뭔데. 종찬이는 멀뚱하게 엄마만 쳐다보며 아무 미동이 없었다. 옆에서 눈치만 살폈다. 종찬이는 적금통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 엄마가 종찬이가 없을 때 내게만 말해 준 적금통장이었다. 종찬이가 대학 들어갈 즈음 그 시기에 맞춰 준비하려던 등록금임을.
그런데 내가 들어간 대학이 서울에 있는 대학이었고 이른바 명문대 축에 낀 대학이라 일반사립대학과는 등록금이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이백만 원이나 더 비쌌고 그 짧은 몇 년 사이에 대통령이 바뀌면서 물가가 올랐고 등록금도 같이 덩달아 뛰었다. 엄마 식당 일의 월급은 그대로인 채. 엄마의 계산 착오가 아니었다. 엄마는 종찬이를 쳐다보면 한숨을 쉬었다. 철딱서니 없는 것. 그 통장이 어떤 통장인지도 모르면서.
돈이 모자랐다. 방을 빼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나 때문에 방이 하나 있는 집으로 이사 가면 종찬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안 그래도 저렇게 난리를 피워대는데 겁부터 났다. 종찬이가 정말 집을 나가면 어쩌지.
-엄마가 윤서 널 위해서라면 몸이 으스러질 때까지 일할 거야. 엄마가 식당 일 말고 새벽에 우유배달 하나 더하기로 했어. 걱정하지 마. 등록금은 곧 해결 날 거야.
그때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 무릎에 대고 누워 많이도 울었다. 어떻게든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할 거야. 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직하면 돈 많이 벌어서 그동안 고생한 엄마 호강시켜 줄 거야.
집에서 학교에 다니자니 종찬이 눈치를 보느라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집을 옮긴 후부터 종찬이는 전보다, 말이 없어졌다. 집에 있는 적이 없어. 학교 마치고 밤늦게까지 피시방에서 보내나 봐. 엄마한테 듣고 알았다.
컴퓨터게임에 집중해 자신 세계에만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현실을 잊어버리려 애쓰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