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옥희배상 안 액자소설

-지혜이야기4-냄새

by 이규만

7일이 지났는데 생리를 한 거처럼 양이 많네요. 제가 원래 생리주기가 정확하거든요. 근데 5월 26일에 생리했고요. 생리주기는 28일이에요. 이게 생리인가요? 부정 출혈인가요?

생리주기가 28일이시면 예정 생리일은 6월 23일. 배란일은 6월 9일. 가임기는 6월 5일에서 11일 사이가 됩니다. 따라서 관계한 날 31일은 가임기를 벗어나 임신 가능성이 적으며 가임기라도 사후 피임약을 드셨으니 95% 이상의 피임 확률이 있습니다. 사후 피임약은 평소의 주기를 당기거나 늦출 수 있으므로 현재의 출혈이 생리처럼 많은 양으로 이어진다면 생리로도 볼 수도 있는데, 더는 출혈이 없다고 하니 복용에 따른 부정 출혈로 보시면 됩니다. 호르몬이 가장 작게 변화될 수 있게 부작용이 없는 약으로 처방해 줄 테니 보름간 하루도 빠짐없이 드세요. 무엇보다 강제적으로 관계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가장 원인일 수 있습니다. 23일 전후로 해서 꼭 생리 확인해 주세요. 임신테스터기로 꼭 검사도 병행해 주시고요. 평소와 같은 생리가 없다면 내원 바랍니다. 꼭.

범죄의 계보를 잇는 사례는 범행을 저지른 뒤 범죄자는 반드시 그 자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수없이 곱씹었다. 내가 당한 그 건물의 가게 앞을 수없이 오갔다.

벌써 한 달여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홍대 부근을 배회하며 보냈다. 다행히 정확한 날짜에 생리했고 병원에는 그다음부터 가지 않았다. 상처가 많이 나서 크게 겁을 준 것만 제외한다면 그녀는 절차대로 나에게 최선을 다해 진료해 주었다. 무엇보다 의사도 여자였다. 이런 일을 여러 번 반복해서 겪었을 테고 찾아오는 여자들도 부지기수로 많았을 것 같다. 그런데 성폭행 피해 여성으로 신고된 건수가 과연 몇 건이나 될까. 나 또한 신고하지 않았다. 과연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 당당히 낯짝을 들고 돌아다닐 수가 있을까. 잡혀서 전자발찌를 차고 다니는 놈보다 더한 낙인을 이마에 찍고 돌아다니게 될지 모른다. 경멸과 조롱, 비난이 어우러져 옆에다 누구든 그렇게 바라볼 것이다. 사후 피임약을 얻기 위해 처방전에다 내 신상 기록을 남기는 순간부터 나는 천한 여자로 전락했다. 밝히는 여자가 됐고 더러운 여자가 됐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그놈 때문이었다. 그놈을 찾아서 처절하게 복수해 주고 싶었다.

부근의 여러 군데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미련한 방법이긴 해도 내가 당한 곳에 술 취한 여자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거기만 이상하게 맴돌았다. 그렇지만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남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전번에 내가 했던 것같이 멀찍이서 술 먹고 휘청대는 여자가 보이더니 전에 내가 당한 거처럼 여자가 가게 앞 계단에 수그리고 자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자가 나타났다. 잠복한 뒤로 보이지 않던 남자가 드디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건드린 남자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얼굴도 희미했고, 단지 기억에 남는 거라고는 목걸이뿐이었다. 나를 유린할 때도 저런 추한 모습이었나. 미영으로 투영이 되어 바지춤을 챙기는 녀석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모자에다 검정 마스크까지 써서 식별이 어려웠다. 그렇게 계속 놔두면 그 여자도 나처럼 당할지 몰라 마음이 급해졌다. 그냥 그 범죄행위만 확인하고 증거를 잡으려는 생각에 서성거렸지만, 저렇게 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방관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웃옷을 벗었는데 바로 목걸이가 드러났다. 눈을 감았다. 그때 내가 당했을 때 그 목걸이가 쩔렁거리는 소리와 비교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여자가 간헐적으로 내뱉는 고양이 울음 같은 앓는 소리와도 겹쳤고 비가 오는 중이라 목걸이가 흔들리는 소리는 아무래도 많이 죽었다. 거리도 꽤 멀고 가느다란 빗소리와 중첩이 됐다. 그런데 목걸이를 찼던 것만으로 어떻게 나를 농락한 그놈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그놈이 맞더라도 나와 어떻게 접촉이 된 건지 증명하는 것도 힘들었다. 하나도 연관된 것이 없다. DNA 유전자 감식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여자는 그대로 당하고 끝장나는 것 아닌가. 나는 아쉬운 대로 가지고 있던 디지털카메라로 여자와 놈을 찍었다. 여자 얼굴도 긴 머리카락으로 가리어져서 전혀 누군지 모르겠고 남자 얼굴도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진 상태니, 사진이 나와도 별반 써먹을 데도 없을 것 같았다. 동영상 촬영으로 돌려놓고 저 짓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비어 있던 맥주 깡통을 던졌다. 던지자마자 음식물쓰레기통 뒤로 몸을 낮췄다. 거리도 거리지만 안에 내용물이 있어야 묵직해서 힘을 받아 날아가는데 채 미치지도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비가 와도 소리만 요란했다. 그래도 맥주 깡통이 약간 효과를 거두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집중하다 움찔대더니 하던 짓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두리번거리다 아무 기척이 없자 마저 하던 짓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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