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옥희배상

-지혜이야기5 -빨간

by 이규만

만약을 위해 대비했던 칼을 가방 속에서 꺼냈다. 혹시라도 이 일을 하다 두 번째로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신용으로 사놓았던 칼이었다. 과도용이라 짧았지만, 모양은 제법 식칼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칼집을 벗기고 놈에게 힘껏 던졌다. 칼도 깡통같이 그 곁에 제대로 미치지 못했지만 제법 놈의 가까운 주위에 떨어졌다. 둔탁하게 쇠 금속성이 콘크리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그는 뒤를 돌아봤다. 경직되듯 하던 짓을 멈췄다. 바닥에 던져져 있는 것이 칼인 것을 확인했는지 기겁하고 바지춤도 제대로 챙기지도 않고 그대로 해서 달아났다.

여자 밑에는 벗겨졌지만, 아직 정액이 방출된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놈한테 당한 거나 진배없었다. 여자의 아래를 재빨리 옷으로 가렸다. 일찌감치 서둘러 막았어야 했는데 조처하지 않았으니 방관한 것뿐이었다. 여자가 깨어나 나를 보면 욕하고, 심하게는 같은 동조자 부류로 오해할 여지도 충분한 상태였다. 결국, 날 위해 여자를 이용한 것밖에는 없었다. 한 달 동안 잠복해 얻은 결과물치고는 허망했다. 카메라에 찍힌 얼굴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 사진 몇 장 가지고 과연 무얼 할 수 있을지.

여자를 부축해서 모텔로 데려갔다. 여자는 아직 술에 절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경험이 있는 여자라면 깨어났을 때 그렇게 당한 걸 나처럼 힘들어할지는 모르겠다.


심부름센터를 찾았다. 사진을 제시하면서 찾아 달라고 하자 채 열흘도 안 돼 연락이 왔다. 인적 사항은 물론이고 사는 곳까지 알아냈죠. 여유만만하게 휴대전화 건너로 직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들은 악명이 높았다. 전문가다웠다.

그런데 심부름센터 사무실에 도착해 그들이 건넨 에이포 용지들과 뚜렷하게 윤곽이 잡힌 사진들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방이 온통 칠흑으로 가라앉았다. 불과 며칠 전에 앓았던 생리통이 다시 도져 왔다. 온몸이 전율적으로 떨렸다.

고 명수? 이거 정말 맞아요? 나는 혹시나 동명이인일까 싶어 되물었다.

맞아요. 건넨 사진만의 인물이 뚜렷하지 않아서 약간 고생은 했는데요. 오히려 사진 주위의 배경들이 찾아내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했어요. 저희가 원래 잠복이 전문이라서요. 똑같은 복장으로 나타나서 계속 뒤를 밟았죠. 그 양반 상습범이던데요. 거기 USB 디스크에 동영상 촬영한 것도 몇 개 있어요. 물론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난 모습이에요. 학교에 다니더군요. 정치외교학과.

서둘러 계약대로 나머지 돈을 지불하고 그들이 추적해서 얻은 자료들을 얼른 가방 안에 다 챙겨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걸 들고 서에 가야 하나. 그다음부터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 내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대로변으로 나오자,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버스가 오자마자 행선지가 어딘지 확인도 안 하고 그대로 탔다. 처음 그를 대하고 어쩌지를 못한 때를 돌이켰다. 에어컨도 켜지 않은 버스 안이 더웠다.

지루한 여름의 여정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6월이었다.









*






카페 사장이 오버타임을 달아 줄 리 없겠지만 지혜 어머니를 피해 카페에 있는 것이 맘 편했다. 일할 시간 때는 한참 멀어도 카페에서 몇 시간 죽 때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카페에서 한창 설거지할 무렵이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노랫말이 가슴 저리게 애간장을 녹일 때 미현이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프레디 머큐리가 좋더라고.”

“너 머리가 갑자기 그게 뭐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눈초리로 미현을 바라봤다. 머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빡빡 깎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심할 정도로 훼손이 된 모양이었다. 마치 쥐가 뜯어먹은 듯한 표현이 어울릴법한 머리 꼬락서니였다.

“애. 그 몰골이 뭐니. 기왕 깎으려면 잘 다듬기나 해 달라고 하지.”

“프레디 머큐리가 한국에 와서 공연했다면 내가 바로 공연티켓을 수십 장을 샀을 텐데. 아마 너한테도 한 열 장은 족히 넘겼을 거야.”

같은 수학과 동기인 미현은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프레디 머큐리 타령이었다. 그녀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그 대목에 심취되어 따라 불렀다. In my defence what is there to say -제 변명을 해보자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뭔 엉뚱한 소리야. 프레디 머큐리 때에 네가 있기나 했니.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삭발 투쟁까지도 감행하는 미현을 볼 때면 그것마저도 시간이 남아도니까 여유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사치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나같이 종일 등록금 걱정하며 단 얼마라도 더 받으려고 아등바등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학생에게는 감히 엄두도 나질 않는 일이었다.

등록금 때문이라고 하면 서로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는 머리로 울상이었고 나는 일할 자리로 항상 걱정이었다.


밤에는 바에서 일하려고 자리를 잡았더니 미현이가 내가 일하는 곳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또 찾아왔다. 머리 모양은 그대로였다.

“모자라도 좀 쓰고 다녀. 그게 뭐야.”

“일부러 이러고 다니는 거야. 시위하는 거지. 다 보라고. 꼴사납게 나한테 이발기 댄 선배가 나처럼 깎는다고 하고서는 지는 그렇게 안 깎더라고. 여자한테 머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등록금 때문에 부모님들의 허리가 휜다. 누굴 위한 등록금 인상인가. 대한민국이 OECD 가입국들과 비교하여 평균치보다 대학 등록금이 세 배나 더 비싸다며 이렇게 외치면 뭐 해. 대자보를 붙이면 뭐 하냐고. 내 머리가 이 모양인데.”

미현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중요한 것은 등록금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가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꾸 등록금에 대한 사항을 들먹였다. 어차피 삭발과 머리 모양의 상관관계는 등록금 때문에 빚어진 촌극이었다. 국가의 잘못된 제도 때문이다. 심지어 이를 개선하지 않는 정치권이나 교육 쪽 종사하는 모든 분이 가만히 침묵하는 것이 개탄스럽다. 비록 그녀도 그렇게 말했을지언정 종국에 도달하는 결론은 자신의 머리 모양이었다. 머리가 여자한테 어떤 의미인지 그 남자 선배는 몰랐다.

“언론이나 학부모들까지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면 뭐 해.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도 내 머리는 그대로인데. 망할.”

나는 그녀에게 진토닉을 한잔 내놓으며 대충 맞받아주었다.

“그니까. 등록금이 뭐기에 머릴 그렇게 깎아놓았어? 내가 그 선배 머리도 너하고 똑같이 만들어 줄까?”

“그래. 그래 주었으면 나도 좋겠어. 도대체 윤서 너는 아르바이트를 몇 개나 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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