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공장에서 딱 삼 개월 버티다가 관뒀다.
나는 그곳에서 딱 3개월 버티다가 관뒀다.
김 부장한테 월급 이야기를 잠깐 했었다.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너무 적습니다. 내가 여기 책임자인 것은 맞지만 나도 월급을 맞춰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사장님한테 이야기해보겠다.
대머리 홀라당 까지고 동그란 안경 낀 사장이 여러 차례 방문한 것을 봤다. 그리고 인사도 몇 번 했었다.
쓰레기차로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는 동안 그가 컨테이너 간이건물로 김 부장을 불렀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참 궁금했다.
내가 내놓은 대안에 대해서 그가 받아들였는지.
안다. 처음부터 월급을 무리하게 올려달라는 것은 어렵다는 거. 일백오십만 원은 어느 정도 경력직에 해당한 사항이니 일백이십만 원 정도는 어떠한가. 그렇게라도 어렵다면 삼 개월 유예기간을 두고 삼 개월째 월급 지급하는 달에 백이십만 원으로 올려주면서 두 달 치에 해당하는 사십만 원을 합쳐 일백육십만 원을 달라. 첫 달부터 일백이십만 원을 맞춰달라는 거다. 단지 사십 만원은 후지급제가 된 셈이다. 그쪽에서 말하는 삼 개월 수습 기간으로 보자면 말이다.
처음부터 내가 생각해낸 대안은 아니었다. 전에 내가 일했던 pc 케이스 유통업체를 찾아갔었을 때 임금협상을 할 적에 내게 제안한 거였다.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삼 개월 수습치고 꽤 많은 돈을 챙겼었다.
사람이 하도 많이 왔다 갔다 하는 기피 업종에서 삼 개월은 혹독한 시련이었고 그 안에 착안해서 기업이 아닌 개인 사업장에서 그만한 구상을 내놓는 것도 꽤 괜찮은 발상 중에 하나라고 봤었다. 그것도 어쩌면 그 케이스 사장이 혼자 생각해 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쪽 방면에 사람 다루는 여러 업체를 두루 전전하다, 좋은 방안인 거 같아 나한테도 당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삼 개월을 사십만 원만 바라보면서 꾹꾹 버텼다. 어머니 몰래 쓸 수 있는 돈이 사십만 원씩이나 생기다니. 얼마나 좋아. 월급은 어머니한테 보여줄 수 있는 내 인생 마지막 성적표이자 초라한 민낯이었다. 그리고 일용직 노동력으로 버티는 내게 일백만 원 선은 최상위 점수였다. 와? 구십만 원밖에 안 부치노? 어머니 그만 좀 하세요. 그렇게 어려우면 형들한테 좀 달라고 하세요. 또 뭐샀노? 이 죽일 놈의 새끼. 또 컴퓨터 바꿨나? 철딱서니 없는 놈. 언제 철이 들꼬. 니는 평생죽을 때까지 나한테 돈 부치라. 내가 관리해 줄 테니.
버텼다. 두 달 동안에 어머니의 그 기나길고 고루한 다그침에도. 어머니 거기서 받는 돈이 백만 원이에요. 그래도 아무리 걸어 다닌다, 차비는 안 들더라도 용돈 십만 원은 써야 하잖아요. 그르게 누가 거길 들어가라고 했나. 그 험난한 델 들어가서 돈 같지도 돈을 주는 데를 들어가서 고생하나? 갑자기 건모형 생각이 났다. 애 건모야 천원 더 줄게 이리 와. 고개 푹 수그리고 가는 건모가 안쓰러워서 불렀지. 기 살려주려고. 애가 풀이 죽었잖아. 건모형 엄마처럼 기는 못 살려줄망정 돈 적다고 저렇게 타박하시니.
버텼다. 김 부장의 달콤한 말로 적당히 구슬렸을 때도. 여기 오 일 근무야. 토요일은 당연히 오전 근무지. 학생들 여름방학이 있잖아. 그때 우리도 십오일씩 휴가 다녀오고. 월급은 유급이지. 일한 거로 쳐주는 거지. 내가 내놓은 대안에 대해 처음에는 수긍한다, 해놓고 말을 이리저리 돌렸다. 사장님이 오시면 다시 말을 해 볼게. 과연 그게 통했을까. 의구심은 머릿속에 떠나질 않았다. 그가 토요일은 오전 근무라고 해놓고 일은 계속해 평일에 끝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음식물이 가장 난적이었다.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음식물 앞에서는 나도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컨베이어 앞에 그 흰 봉투를 풀고 쏟아냈을 때 음식물은 그대로 올려보냈다. 쓰레기차에 올라간 김 부장은 염불을 토해냈다. 장화를 신은 그는 위에 올라가서 계속 밟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로 시작됐다. 목탁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쏟아내는 염불은 이 세상 어떤 주문보다도 어떠한 철학보다도, 그 어떠한 종교보다도 거룩했다. 그 어떤 스님이 저런 염불을 쏟아낼 수 있을까. 내 일당이 부당하다고 느꼈지만 김 부장 앞에서는 결국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환갑이 넘은 저 양반이 저렇게 쓰레기차에 올라가서 그 온갖 썩은 냄새를 참아가며 물을 뿌리고 쓰레기들을 밟고 있는데 나는 거기서 월급 가지고 이러고 있다니! 참자. 나도 일에 대해 너무 안이했다. 돈이 조금 모자라더라도 견디다 보면 언제가 때가 오겠지.
일하는 동안에도 그는 나한테 몇 번씩 어필했었다. 사장한테 보고했으니 그렇게 해 주겠다.
네가 말한 대로 월급은 백 이십만 원을 맞춰주고 나머지 부분도 지급하겠다. 사장님이 그렇게 해 주겠대.
곧 단국대 축제였다. 김 부장이 말한 5월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는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산더미같이 쌓인 쓰레기들 앞에서 나는 절망했다.
1t 트럭 차를 몰고 간 서 부장이라는 사람은 기숙사 앞에서 소리쳤다. 여봐! 학생들 왜 쓰레기들을 분리해서 내놓으려고 해? 우리가 다 정리한다니까. 봉지에 다 때려 담으라니까. 트럭 보조로 같이 타고 갔다가 정말 황당했었다. 김 부장과 동년배같이 보였지만 결국 그도 거기에서는 책임자가 아니었다. 축제 기간에 학생들이 내놓은 물품들을 빼돌리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축제 기간에 혼자, 혹은 나를 대동하여 아침마다 대학교 건물 주변에 널브러진 소주나 맥주 상자를 챙기기에 바빴다. 자각 있는 학생들은 오후 끝에 찾아와 서 부장이 챙긴 물품들을 찾으려 했지만 숨기기에 급급한 그 앞에서 포기하고 돌아갔다. 찾으려면 찾아봐. 우리 컨테이너 숙소까지 뒤질 거야? 씻는 목욕실까지는 설마 못 들어오겠지.
부조리가 팽배했다. 거기서도 부조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얼마 되지 않네. 애들이 우리가 기거하는 숙소까지 찾아올지 몰랐어. 단국대에서 축제 때 그렇게 짜게 구는가? 애들한테 축제 때 쓰라고 돈을 줄 거 아냐? 우리도 좀 먹고살아야지.
서 부장은 옆에 튀어나온 사람이었다. 말은 같은 직급이라고 하지만 김 부장과는 판이하였다. 분리 작업도 거의 하지 않았다.
삼 개월이 지나고 10일이 월급날이었는데 일백만 원이 조금 넘은 금액으로 나왔다. 나는 당장 김 부장한테 소리쳤다. 월급이 이게 뭡니까? 왜? 왜? 삼 개월째 되는 때에 지급하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뭘? 뭘 이라뇨? 월급 말입니다. 아 그래. 맞아. 이십만 원씩 해서 사십만 원 포함하고 120만 원 지급하기로 했었지. 그런데 그렇게 안 나왔어? 백만 원만 달랑 나왔어요. 아 미안해. 사장님한테 바로 전화해서 알아볼게. 조금만 기다려봐.
기다리는 동안에도 컨베이어 올라가는 쓰레기를 고르는 중이었다. 통화를 마쳤는지 그가 나를 불렀다. 미안한데 사장님이…. 그는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했는데요?
언제 그렇게 준다 했어?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말이었어. 뭐라고요? 이야기는 했습니까? 이야기야 당연히 했지. 그리고 나는 받아들인 줄 알았어. 그래서요? 못 주겠다는 겁니까?
내가 다시 이야기해볼게. 됐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이봐. 그러지 마. 당신이 바로 나가면 여기는 어떻게 해?
나는 바로 옷도 갈아입을 필요 없이 가방을 챙겼다.
터덜터덜 걸어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소리쳤다.
와? 또? 그만뒀나?
작업복 차림이 그대로인 채 퇴근 시각이 훨씬 이른 것을 본 어머니는 금방 알아차린 거였다.
돈은 부쳤나? 저거 보래이. 그 꼬락서니로 어딜 들어 오노? 미친놈의 새끼.
눈을 감았다. 집을 나가고 싶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아직도 내 인생 점수는 일백만 원도 아니고 구십몇만 원이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해야 살 수 있다. 숨 막힌다. 벼룩시장 신문의 구인 광고란을 또 뒤졌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는데 김 부장이었다. 사장님이 다 수용하고 돈을 주겠대. 다시 올 수 없겠어?
이 양반이 날 가지고 놀고 있네. -됐거든요. 저 바로 취직해서 일하고 있으니 다신 전화하지 마세요. 더 이상 이야기할 값어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