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겨울비 -1

윤미와의 첫 만남.

by 이규만

제2장 겨울비.



전동차가 동작대교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출입문 부근에 자리를 잡았는데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한테 시선이 갔다. 머리는 단정히 빗어 뒤로 묶었고 흰 카디건, 청바지에 간소한 차림이었다. 옷차림으로 봐서는 여대생쯤으로 보였다. 특유의 창백함이 묘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자가 잔뜩 긴장했다. 표정이 비근한 생리현상을 겪는 모습 같았다. 당장 화장실이라도 가야 할 판이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모습이 꼭 그렇게 보였다.

동작대교는 다른 구간보다 좀 긴 편이었다. 안전사고 주의에 대한 방송도 흘러나오고.

여자는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것을 보면 급하게 집에서 나온 거 같다. 여자는 시선을 느꼈는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고 한동안 쳐다봤다. 여자의 동공이 커지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입술을 움직여 나를 향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다급해 도움을 요청하려는 듯한 자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이었다. 마네킹이 쓰러지는 것같이 곧바로 앞쪽으로 쓰러졌다.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얼굴은 그대로 바닥으로 향했다. 쿵.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컸다. 사람들이 많이 탔더라면 비좁아서 사람들한테 기대는 형식이 되었을 것이다. 빈 곳이 넓어 문에 기댈 여지도 없이 큰 동작으로 넘어졌다. 심근 경색이나, 고혈압, 아니면 뇌졸중, 빈혈……. 갖가지 병명이 떠올랐다. 몇몇 되지 않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쳐다봤다. 저걸 어째! 어떻게! 소리만 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한테 다가가 뒤에서 안았고 몸 자체를 세우려고 애썼다. 여러 번 뒤에서 허리를 잡아 올려 다리를 쓰게 하려 했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다리는 힘이 없이 흐물흐물 그대로 굽혀졌다. 몇 번씩이나 같은 시도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자를 겨우 철제의자에 앉혔다. 잠깐 기절한 것 같았다. 눈뜨고 기절한 사람은 처음 봤다. 여자가 숨이 이대로 끊어진 게 아닐까. 코에다 손을 대 보았다. 콧바람이 가벼우면서도 따스하게 전해졌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랐다. 기절한 순간이 오래갈 줄 알았는데 여자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여러 차례 옆으로 왔다 갔다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았다. 두 번 했다. 세 번째에 어질어질 중심을 잡고 서려고 하더니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를 부축해 줬다. 괜찮으세요? 여자는 얼굴 쪽으로 바닥과 닿은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손등으로 이마를 매 만졌다. 넘어졌을 때 여자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자는 눈을 감지 않았고 그대로 뜨인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팔과 다리가 마비된 거처럼 보였었다. 눈이라도 감겨 있었으면 일시적으로 겪는 어지럼증이라 봤을 텐데. 뭐랄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습이 꼭 밀랍 인형 같기도 하고. 극한 표현을 쓰자면 시체 같았다. 섬뜩했다.

전차가 멈추고 차 문이 열리자 앞에 공익요원이 보였다. 도움을 요청하니까 여자를 옆에서 같이 부축해 주었다. 고마워요. 여자는 상황이 쑥스러웠는지 오른손으로 이마를 가리다가 매만졌다. 처음에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가 생각났다. 쌀쌀맞고 매정하게 바라봤던 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기서 내릴 때가 아니고 서울역에서 내려야 해요. 그제야 그녀는 말을 건네 왔다. 몸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는지 일어서지 못했다. 전차가 멈추고 바로 앞에 문이 열린 것을 보고도 여자는 작게 웅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병원에 가는 것이 좋겠어요. 공익은 여자를 앞으로 안내하려는 참이었다. 그게 낫겠어요. 같이 내리죠. 전동차는 기다려주지를 않고 문이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공익은 가지고 있던 무전기 안테나를 문틈 사이로 끼웠다. 전차가 서서히 움직이려다 가지도 못하고 섰다. 문을 열어주세요. 수 초 동안 전동차가 멈추어 있다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차에서 내려 부축한 여자를 자판기 옆 플라스틱 의자에 앉혔다. 공익은 그나마 안심이 됐나, 무전기로 한참을 연락을 취하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다른 일이 생겨 가 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병원이라도 데려다 주지. 가버리다니. 어지간해야지. 너한테 말한 내가 잘못이지. 나는 공익 뒤통수를 바라보며 뒷말했다. 얼떨결에 따라 나오긴 했는데 지각할까 걱정이었다. 일단은 회사에다가는 전화를 걸어 좀 늦을 거라는 말만 전하고 간단하게 끊었다. 병원에 가야죠. 부축하려고 들자 여자는 내 손을 가만히 물리쳤다. 조금만 더 앉아 있을래요.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전동차가 지나가는 스크린도어를 바라봤다. 희미하게 비친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모른 척하고 가기에는 무심할 거 같고 끝까지 가자니 보상을 바라고 눈치를 주는 사람으로 보일까, 괜히 겸연쩍었다. 이쯤에서 물러서자.

여자는 내게 눈길을 줬다. 좀 전과 달리 짧은 하얀 미소가 번졌다. 느낌이 넘어졌을 때와 아주 달랐다. 마주 봤을 때는 예쁜 여자구나 했는데 웃는 모습으로 보니까 또 달랐다. 깨끗하고 맑았다.

"고마워요. 전에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따라 힘드네요. 출근하시는데 저 때문에 곤란하시겠어요. 얼른 가세요."

"아…. 네. 그래도 지금 병원에 가 보시는 것이 낫지 않나요?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제가 병원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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