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원시장, -빨간양말의 비밀, 회식 -과로한 연장근무
그나마 몇 사람의 신입사원이 있었지만 일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려면 며칠 더 배우고 익혀야 할 상태였다. 상준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뛰어다녔다. 힘들어하면서도 한마디 불평이 없었다. 혹여라도 부정적인 이미지라도 비치면 전에 전 녹중 계장이 약속한 바를 그는 두려워한 이유여서 일지 모른다. 눈여겨보고 있다. 자칫 밉보이면 야간에 시트 배합치고 시트만 굽는 지독한 터널오븐 곁으로 보내버릴 수가 있어. 그러니 군소리했다간 알지?
나는 그의 일을 다른 일 인양 뒷짐만 지고 섰다. 보통날의 하찮은 일상인 양 빨리 지나가길 기다렸다. 눈치는 빤하게 짐작은 갔지만 전처럼 달려들 수 없었다.
손에는 각자 하나씩 들렸다. 양재기이든 주걱이든. 유니폼을 입은 채 줄줄이 따라 밖으로 나오니까 꼭 아수라장에서 겨우 빠져나온 피난 행렬 같았다. 일반주택가였으면 정말 이상하게 보였을 테지만 공단이라 그런지 별반 이상한 것도 없고 보이는 것은 공장 건물들과 동료랑 나밖에 없었다.
신축 건물에 오르니까 페인트 냄새가 확 났다. 건물은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것같이 텅텅 비워져 스산했다. 아직 설비들이 들어서지 않은 상태여서 웅장함이 크게 다가왔다.
케이크부서는 ‘F’였다. 다른 층은 계단복도에 층수 표시가 되어있고 병원처럼 부서는 F로만 표식이 박혔다.
이사를 하기 위해 크레인이 올 줄 몰랐다. 크레인으로 장비를 올릴 때마다 큰 외벽이 문처럼 열렸다. 셔터처럼 올렸다, 내렸다 반복이었다.
장비들과 도구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장비래야 바인더 여섯 짝과 버터 믹서와 그 외 소형냉장고였다. 그리고 조립식 냉장고에서 분리해 낸 외벽들이 같이 올려졌다. 달리 보면 일할 때보다 하루 까먹는 시간이었다. 나르는 것과 올리는 것들은 차하고 크레인이 했고 자리만 지정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모두 지쳐있는 상태였다. 피곤이 누적이 상태라 더 그랬는지 나처럼 멍한 상태로 전 녹중 계장만 쳐다봤다. 세부 정리는 내일 제품을 만들면서 하자. 고생했어. 어서 들어가. 전녹중 계장도 피곤한 안색이었다. 그는 이사를 시작할 적 아침과는 달리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여기저기 그릇들과 여러 가지 앞으로 정리해야 할 잡다한 짐들이 널브러졌다. 가늠해 보건대 백여 평도 훨씬 넘는 것 같았다. 양과 반과 데커레이션 부서가 쓰기에는 전에 있던 부서에 비해 너무 넓은 작업장이었다. 보니 부서가 다 쓰는 것이 아니라 남향으로 난 창문 쪽으로는 롤 케이크반의 터널오븐이 들어 올 자리 같았다. 바닥은 반들반들 빛이 났다. 관객이 떠나 버린 빈 무대처럼 햇볕이 내리쬈다. 볕이 드니까 내일을 잊었다. 시간이 빠른 흘림으로 느껴갔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여유로 느릿느릿 흘러갔다. 만끽한 한순간이 타오르고 절정으로 내달임. 쳤다.
어느 사이 맹목적 허무가 들이찼다. 아등바등해 온 것들이 진절머리 날 정도로 붙들고 늘어졌다. 물망을 가르던 공간이 한 축으로 비껴가자 빨려 들어갔다.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고도로 숙련된 솜씨로 멋지게 짤 주머니를 쥐고 그림을 그리려던 순간이었다. 피아노 건반을 만지는 손같이 위로 둥둥 떠서 흘러 다녔다. 발레리나 같은 동작으로 손을 모았다.
그런데 무대 위로 여자가 섰다. 애숙이었다. 그녀의 유니폼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아 시선은 창문 밖을 응시 중이었다. 아까 큰 문짝같이 오르락내리락했던 셔터의 창 바로 앞이었다. 애숙이 부러웠다. 자리는 내가 차지하여 따사로운 햇볕을 혼자 맞으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올 줄이야.
집 생각해. 부모님 생각. 내일 일 생각. 옆에 다가가고 싶었지만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 했던 것과 같이 그녀도 같은 시간이길 바라면서.
언니 뭐 해? 빨리 가야 해. 기숙사 가야 한다고. 순임 목소리가 한참 먼 곳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텅 빈 곳이라 메아리로 돌았다. 그녀는 훌훌 일어났다. 아쉬운 듯 빛으로 내쳐오는 자리에 힐끗힐끗 시선을 보냈다. 그녀가 가고 나니 다시 이루 말할 수 없이 허전했다. 잠깐이었지만 그녀가 맞았던 햇빛을 보았다. 쪼그리고 앉아 그녀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창밖으로 차츰 해는 저무는 때라 비추는 그 빛으로 건물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눈을 감았다.
서둘러 퇴근하려 할 때였다.
“형 오늘 너무 고생했어.”
“그래 너도.”
“한잔해야지. 형. 이렇게 일찍 끝난 것도 오랜만인데.”
“그럴까나?”
“그럼. 당연하지. 난 오늘을 별러왔어. 언제 이런 날이 오나.”
“하긴. 꽤 됐다. 술 마신 지도.”
“그럼. 직장 생활하는데 이게 낙 아니겠어? 일 끝나고 소주 한잔. 얼마나 좋아.”
녀석은 웃었다. 항상 웃는 녀석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힘들어도 내색 한 번 안 하는 녀석이 기특할 정도였다. 롤 케이크 부서에 있다가 이쪽으로 발령된 것도 얼마 안 됐다. 야간 일만 해서 낙이 없었다는 녀석의 말이었다. 일 끝나고 아침에 대작을 벌릴 일이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술 한잔하려는데 모두 갔어. 어째 사람들이 그러냐? 정이 없어.”
아무래도 그는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나와 상준은 새로 이사 온 건물 앞에서 서성거렸다.
“안 되면 우리끼리라도 가지 뭐.”
언제 술 마실 때 동료들이랑 같이했었다고. 그냥 가자니까. 나는 녀석이 저토록 아쉬워하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망태처럼 찌그러져 있었다니까. 정말 먼저 간 건가. 다들.
마침 애숙이 순임의 팔짱을 끼고 같이 나타났다. 순임은 표정이 굳어있었지만, 애숙은 환하게 웃었다. 반갑게 나와 상준을 대했다. 홀렸다. 마법을 지닌 미소였다. 흠뻑 취했다. 새로운 감정의 일로(一路)에 사로잡혔다.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았다. 일이 그렇게 힘들였는데 얼굴은 무척 생글생글 이었다.
애숙이 미소를 지으면 방금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한 송이 백합꽃 같았다. 그것으로 만사가 좋았다. 오랜만에 보는 애숙의 사복 차림이었다. 이전의 건물은 기숙사가 연결되어 있어 일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회식 때나 가끔 볼 수 있지만 그것도 그녀가 회식을 나오지 않겠노라 거부하면 못 보는 거였다.
나는 상준과 함께 있는 순간에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직된 채로 굳어지자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다리고만 있었다. 옆에서 보면 화가 난 모습같이 볼지 몰랐다. 이상하게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애숙이 가까이 다가오면 뭐라고 해야 하나. 상준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언제 안면까지 텄다고 말까지 놓아가면서.
“애숙 씨. 이사 온 첫날인데 술 한잔하러 갈래?”
“그럴까? 나야 당연히 좋지. 순임이도 있는데 같이 가도 돼?”
“당연하지. 순임아. 같이 술 한잔하자.”
애숙이도 나름 순임이를 생각하고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순임은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빼려 들었다.
“같이 가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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