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상대원 블루스. -8

“넌 공장에 일하러 온 거니? 연애하러 온 거니? 어이구 답답이.

by 이규만

퇴근을 막 하려는 1층 현관 앞에서 애숙이가 날 부르며 전날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애숙은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몰랐다.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얼마간 속상해하며 애를 태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숙이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나를 당황하게 하고 힘들게 했다. 어떨 때는 반말을 하다가 또, 어떨 때는 존댓말이었다. 어떤 모습이 진정 그녀 모습인 걸까. 작업장 내에서는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져 내게 표현을 못 했던 건가. 애숙이 다가왔을 때 바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용기가 없었다. 한 번 웃거나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감격해 주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까. 애숙은 정말 나의 연인이 되었을까. 내가 정말 그녀의 일부가 되었을까. 그녀가 다가오는 기회를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해 주저주저했다. 이럴 때 상준은 어찌했을까. 그는 충분히 애숙을 사로잡고도 남았을 것 같다. 내가 있어서 그렇게 눈치만 봤던 건 아닌가. 그저 멀뚱히 애숙만 바라보다 그녀를 외면하고 회사 정문 앞을 나왔다. 다가서는 애숙에게 당황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의 안타까운 눈빛이 그대로 스쳤다.

집에 돌아오자, 넋이 빠졌다. 왜 그랬을까. 한참 생각했다. 애숙이도 나를 기다렸던 거지. 내가 나오는 시간까지 계산하여 그렇게 빨리 옷을 갈아입고 다른 데로 샐까, 정문에서 기다렸던 것인데. 속이 상했다. 상준처럼 넉살이 줄줄 새어 나오질 않는 걸까. 진지한 척 매번 고민은 혼자 다 싸안은 것같이 굴었다.

애숙아. 고향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할래. 크리스마스잖아. 그랬더라면 수십 번이라도 웃으며 그녀는 스스럼없이 내 팔짱에 매달렸을 텐데.

나 때문에 출근하지 않은 동료들에게 얼굴 볼 명목이 서질 않아서 이제윤 주임에게 말하고 다음 날 쉬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도 난처해지기만 했지, 그들의 화를 잠재우기 위한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들도 힘들고 고단했기 때문에 나의 말을 따라 준 거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계장들의 질타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아무도 나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저만치 나를 경계하고 피하려 들었다. 저런 배신자가 있나. 자신이 안 나오자 해 놓고 당일 나와서 일하다니. 어이가 없어하는 눈치들이었다. 호철이도 그랬고, 홍선이도 그랬다. 상준이도 마찬가지였다. 괴로움을 잠시 잊고 싶어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올라와서 상(上) 자 박스가 있는 작업장 한편에서 눈을 붙였다. 조금 잤나. 찬바람이 느껴져 금세 눈이 뜨여졌다. 저만큼 창문가에서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재료 상자에 걸터앉아 춥지도 않은지 십이월의 겨울바람을 맞고 있지 않은가. 뒷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위생복 자태로 봐서는 분명 여자였다. 여자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애숙이었다. 잠시 움찔댈 정도로 놀랬다. 냉정해지려 했다. 추워. 창문 좀 닫으라고. 그녀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계속 창밖을 주시 중이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다. 용기를 내려고 몇 번 심호흡을 가다듬고 다가가려고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왔는지 상준이 끼어들었다. 이럴 땐 정말 넌 도움이 안 되는구나. 방해꾼.

“왜 그러고 있어?”

멀찍이 지켜봤다. 애만 탔다. 애숙도 뭐라 말하는 것 같아도 상준이 말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혹 애숙도 나 때문에 괴로워 고백하는 것은 아닐까. 힘들어서 그런다고. 나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무슨 말을 했는지 상준에게 물어봤다. 그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게슴츠레 바라보았다. 왜 궁금해? 별반 다른 말을 없었어. 물어봐도 대답도 않고. 그저 일이 힘들어서 그럴 뿐이라고. 애숙은 아무에게나 속을 드러내 보이고 엄살을 부리는 여자는 아니었다. 나의 상심은 컸다. 그리고 깊었다.

“내가 왜 그날 출근하게 했냐면 다 애숙이 때문이야. 애숙이가 그러지 말라 말렸거든.”

“그래서 형? 그게 무슨 소용이야. 형이 한 번 뱉은 말은 지켰어야지. 어째 그러냐고.”

옆에서 창식 기사가 한마디 더 거들었다.

“넌 공장에 일하러 온 거니? 연애하러 온 거니? 어이구 답답이. 그만 좀 해라.”

불안한 심기를 여러 사람에게 끼치고 돌아다녔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어. 애숙이 나오라고 해서 나온 거라고. 나는 일방적이었다. 소문은 파다해졌다. 우리 부서뿐만 아니라 롤 케이크 반까지 수군댔다. 여기저기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녀는 날 피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피차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무 일이 없는 듯 무감각해져 버린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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