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에 철거민으로 와 우리 집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해
이 한동안의 모질은 감상의 턱은 무슨 의미일까. 여자는 여자대로 나름 버틴 것 같았다. 그녀의 마지막 은신처마저도 무참히 점령하여 질리도록 만든 상태였다. 말로만 나온다고 한 건 아닌가.
'스끼' 주점이었다. 소주 한 병과 어묵을 시켜 놓았다. 어묵이 담겨있는 국물을 후룩 거린 게 몇 번이었다. 초조하게 벽에 달린 시계만을 바라봤다. 벌써 삼십 분이 지났고 나는 혼자서 소주 반 병을 비웠다. 애증과 번민을 계속하면서 빨간 장미꽃 한 다발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좋아할까? 그녀가 정말 나오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행여나 의무감이라면 나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딸랑.
드디어 가게 문의 방울 소리가 울렸다. 문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였다. 무척 반가웠다. 한참 술잔을 쥐었다 놨다 하던 참이었다. 애숙은 베이지색의 롱 커트 차림이었다. 미소와 화려함의 대비였다. 지독히도 예뻤다. 김 한길이 그랬다. 소설에서. 여자를 말할 때 쓰는 말치고는 매우 간단하고 작은 글이었지만 그 같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표현하기도 힘들다. 눈과 오뚝한 콧날과 립스틱을 약하게 발랐는지 번들거리는 입술. 긴 머리. 표정을 훑으며 간간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관자놀이가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애숙은 약간 겁먹은 표정이었다. 이 남자가 뭘 작정한 건지 이처럼 진지하게 나오는가 싶어 한눈에 보기에도 피하려는 눈치였다. 술은 좋아하지만 이런 자리는 정말 부담스러운 자리인지인가 보다. 내가 술잔을 권했다. 술은 안 마실 거야. 곧 가봐야 할 곳이 있으니 용건만 간단히 말해. 비참해졌다. 그리고 야속해졌다. 그러면 왜 나온 거니? 나오질 말지. 어차피 이런 자리였다는 거를 어느 정도 짐작은 했을 텐데. 일말의 다른 기대를 하고 나온 건가. 알 수가 없다. 마냥 한도 끝도 없이 기다릴 거를 생각하니 측은 했었나. 그래도 남자의 이야기나 들어보려고? 들어보나 마나지. 예전처럼 돌리기 쉽지 않다는 거.
돌아가라 일렀다. 그리고 남은 소주는 내가 다 먹을 참이었다. 애숙이 좀 화가 났는지 바로 전보다는 목소리 톤이 높아진 느낌이었다. 뭐 하러 나오라고 했어? 사람 실없게. 다신 부르지 마. 그때는 불러도 안 나올 거니까.
애숙이 돌아가려 할 때였다. 그래도 꽃은 널 주기 위해 산 거니 받아줘. 그녀가 머뭇거렸다. 내가 말은 안 하고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나의 간곡함에 꽃은 받아들였지만, 표정은 갖가지로 나처럼 심란해 보였다.
애숙이 가고 나는 잔에다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한숨을 내 쉬었다. 담배를 끊은 지가 한참 되었는데 술을 먹을 때마다 담배가 땅긴다. 그래 어쩌자고 넌 내 곁에 온 거니. 그래 어쩌자고 너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거니.
술 한 병을 다 비우지 못하고 셈을 치렀다. 그리고 곧바로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담배 연기가 훅 흩어져 간다. 목이 칼칼해져 왔다. 폐부로 깊숙이 연기가 점철된다. 한 모금씩 빨 때마다 담배 불꽃이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저녁거리는 비틀거렸다.
이대로는 도저히 끝낼 수 없다, 생각했다. 어차피 막다른 길까지 왔다. 모질게 마음먹었다. 애숙의 입장이 더 난처해지더라도 끝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순임을 통해서 들어 알게 된 일이지만 여자 기숙사에는 세탁기가 없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았다. 전에 있던 기숙사 때부터 계속 건의해 왔던 일이었지만 사측에서는 계속 보류를 해왔던 모양이다. 여러 사람이 쓰다 보면 고장도 잦은 지 세탁기 구매는 보류상태였나 보다. 애당초 안 될 일이기는 했다. 동원훈련을 마치고 난 날도 찾아가 완전히 퇴짜를 맞은 마당에 그래도 애숙의 마음을 사는 일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세탁기가 돈이 얼마나 들어가던 시도는 해볼 작정이었다. 나는 중고 가전을 파는 데로 달려가 육만 원이라는 돈을 덜컥 내고 한 달 사후관리에 배달, 설치까지 요구했다. 중고를 파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했다.
그제 찾아간 집이라 조금 헛갈려 기숙사를 찾는 데 좀 애를 먹었다. 세탁기를 든 설치 기사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세탁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굉장히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나한테 화를 낼 수는 없고 세탁기 덩치는 크고 도무지 정확한 장소는 어디인지 오리무중이고 나도 참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괜히 샀다는 후회감이 밀려오고 무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집이 맞는데…….”
“도대체 어디예요?”
그는 이제 세탁기를 을러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내는 포기한 눈초리로 날 멀거니 봤다. 바로 그때 그제 안면이 있던 동료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담벼락 사이로 나오려던 참이었다. 너무 반가웠다. 바로 이 집이네. 애숙이 좀 불러주세요. 여자애는 날 보자마자 아 –하는 탄성 소리를 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애숙을 불렀다. 지난번에 애숙을 불러 달라 했을 때 날 비웃었던 여자애였다.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보였다.
“언니! 언니! 좀 나와 보세요.”
전번처럼 애숙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외려 자신이 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안 나오겠다는데요?”
“세탁기를 사 왔는데요. 중고로요. 세탁기만 설치하고 가게 해주세요.”
여자애는 좀 전에 하던 거처럼 또 아 –하고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벼락 아래에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미동이 없던 애숙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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