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동의 불행한 산재사고 -잘린 집게손가락은 시럽분사기에 그대로 있나
일기는 써야지. 부스럭거리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방에 들어왔다. 불 끈데이. 빨리 뒤지비 자라마. 잠깐이면 돼요. 펜대를 잡고 몇 글자 적었나. 갑자기 전화가 왔다. 요란스러운 벨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깜박 졸은 모양이었다. 전화기가 거실에 있지 않고 바로 내 방에 있지? 의아해하면서도 바로 전화를 받았다. 상준이었다. 상준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이 시간에 웬일이니. 상준은 전혀 피곤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넉살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하하. 기숙사에서 한잔할 건데. 같이 하자고. 몸이 말이 아니라서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야.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예의상이나마 자리에 참석해. 얼굴만 비추라니까. 상준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형. 정말 이러 기유? 형이 아무리 그래도 얼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혹시 알아? 어울리다 보면 살맛 나는 일이 생길지. 그러지 말고 잠깐 와.
-미안해. 정말 그럴 기분이 아니야.
-집까지 찾아간다.
-우리 집을 네가 어떻게 알고?
-다 아는 수가 있지.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의를 수락하고 말았다. 글쎄. 네가 언제 나랑 우리 집에 와 본 적이 있었다고. 이 늦은 시각에 집에 오겠다는 거야. 암만해도 모를 일이었다.
기숙사 현관 앞에서 상준을 불렀다. 여러 번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자, 현관문을 당겨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신발장 앞에서는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밤색 구두가 한 켤레 있었다. 상준이 녀석이 장난치나 보다. 상준을 불러 보았다. 큰 방에서 어슴푸레 사람의 기척이 나더니 잠시 그 기척이 윤곽을 드러내 보였다. 문지방에 슬쩍 고개를 기댄 모습은 흰색 블라우스에 청바지 차림의 바로 애숙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시간에 대한 모든 움직임의 세계가 다 멈추어 버린 양, 마주친 채로 그렇게 서 있었다. 또다시 이 순간이 왔건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계속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내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피하려고 달아나려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애숙이 계속 부르며 나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이내 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애숙은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고 신발은 벗은 채였다.
-승동 씨, 왜 이래요? 왜 자꾸 나를 피하려고만 하죠?
애숙은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존댓말을 하였다. 애숙은 지난번 자신의 불분명한 태도로 헛갈리게 하는 것처럼 다시 존댓말이었다.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것은 분명하였지만, 그래도 다 고만고만한 또래로 만났으니, 말투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피하려고 했던 건 내가 아니고 애숙이었다.
-너를 보러 온 것이 아니야. 나는 그저 상준이를 만나러 왔을 뿐이야.
그 말을 하고 나서 그다음 행동을 정하지 못해 서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상준이 녀석. 녀석의 발상 일게다. 녀석이 꾸민 것이 틀림없어. 애숙이를 부추기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 모두가. 멀찍이서 애숙을 바라보고 내 곁에 오기만을 그렇게도 원했는데 막상 닥치니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로 그렇게 서서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어려 있었다. 그렇게 눈빛이 마주친 채로 오래 서 있는 것이 힘들었다. 이게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었다.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품 안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도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억제를 못 하겠다는 것인 양 품 안으로 숨 가쁘게 파고들었다. 애숙을 감싸 안은 두 팔이 떨렸다. 애숙의 향기가 콧속 가득히 스며들었다. 진한 화장품 냄새, 샴푸 냄새. 그 냄새를 맘껏 즐겼다.
아마도 그 순간에 지리멸렬(支離滅裂)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계속되었을 것이며 바람에 쓸려 구름이 몇 번인가 변모했고 어둠이 차곡차곡 까만 색깔을 깔아 가고 있을 어스름 저녁 무렵이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나락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내 앞에는 애숙이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니까 성남시청 앞 네거리였다. 그러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카페로 들어섰다. 제삼자로 옆에서 지켜보다가 시선은 나로 돌아왔다. 아련하게 시선은 떠돌다가 어느 정점에서 멈추었다.
애숙이가 나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을 포옹으로 보여주었음에도 불과하고도 뭐가 더 확인할 게 있었을까. 나는 온건하지 않았다. 그대로 관계를 지속시키기에는 애숙의 행동에 대해 의문이 많았고 그때까지도 완전히 내게 기대 온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때가 언제더라. 진숙이랑 가게 앞에서 만나던 날. 내가 기숙사까지 쫓아갔었잖아. 왜 날 외면한 거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
-그걸 꼭 알아야겠어?
-그래 알고 싶단 말이야. 때론 너의 불분명한 태도가 나를 얼마나 당황하게 했는지 알아?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음 날 너를 보면 너는 한 걸음 저만큼 물러나서 나를 비웃는 것 같았어. 어떤 모습이 너의 진짜 모습이냐고?
-미안해. 전에 순임이가 내가 하도 승동 씨 얘기를 하니까, 상대방에게 밀고 당기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승동 씨가 멀어지면 어떻게 하나. 애도 태웠고. 이젠 됐어? 이제 됐냐고? 정말 너무해.
애숙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울었다. 나도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다. 애숙은 다소 진정을 되찾았다.
-나도 확인할 거 있어. 승동 씨는 그러면 작년 크리스마스 날 생각나? 퇴근하려고 하는데 현관 앞에서 승동 씨를 기다렸는데, 승동 씨가 나 외면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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