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겨울비 -4

지하철 4호선은 이제 타지 않을 거야.

by 이규만

저녁 식사. 지하철 데이트. 그리고 무엇보다 전동차 안에서의 강렬하고 감미로운 키스. 아마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간직하고 추억하는 것보다 한편으로는 그녀랑 같이 보내야 할 시간을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소심하게 군적도 있었지만 내심 기대를 해 본 것이다. 그러한 때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였다.

일이 끝나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소주. 이 녀석. 꽤 반가운 녀석이다.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말간 그 형체를 입에다 털어 넣는 순간 알싸함이 감돌고 점점 기운으로 퍼져 오는 얼얼함이 좋았다. 진지한 구석이 많은 녀석이다. 그래서인지 유쾌할 때보다는 힘들 때가 많다. 그리고 생각을 둔화시켜 잊을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윤미를 희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중간에 종범을 부를까 하다 관뒀다. 원래 그 녀석은 나와 윤미 사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녀석이 아니던가. 연락해 나오라 하면 위로는커녕 훼방을 놓고 말뚝을 박아 버릴 녀석이다. 이참에 잘 됐어. 싹 잊어.

나란히 비운 소주 두 병이 희미하게 비쳤다. 조용히 일어나 술값을 치르고 나왔다. 발길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걸으며 소리쳤다. 윤미야! 윤미야!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쳐다봤다. 미친놈 작작 좀 마시지.

소리치고 싶다. 가슴 후련하게. 그래도 모질어야 한다. 만나면 윤미의 긍정 증후군 합병증에 전염되어 신음하면서 괴로워할지 모른다.

인연이라는 고리를 단칼에 무 자르듯이 할 수 있었다면 윤미를 백 번, 아니 수천 번 만나고 헤어지고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기에 한동안 그녀의 전화나 문자도 적당히 자연스럽게 물리칠 요량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문자나 전화는 더 많이 나를 힘들게 했다. 외면할 수가 없었다. 방법은 단 한 가지 -전화번호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더 독하게 맘을 다지고 추슬렀다.

한동안 그렇게 시간이 가는 듯했다. 또 그렇게 잊혀 가는 듯도 했다. 그동안 일에만 전념하며 살았다. 무슨 영업사원이 전화번호를 쉬이 바꾸나 거래처에 욕지거리도 비슷한 말도 듣고 사장은 사장대로 바뀐 번호 가지고 딴죽을 걸었다. 아니 이 사람아. 당신 밥줄이 전화번호야. 무슨 엿가락 바꿔먹듯 그렇게 쉽게 번호를 바꿔? 애들이야? 휴대전화 새로 샀어?

그녀의 어머니가 직장으로 찾아왔을 때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직장도 빨리 정리하고 그만뒀어야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치명적 실수였다. 아차, 싶었다. 윤미도 그동안 회사 이름도 모르고 부근에 온 적도 없었는데 내가 단순하고 안일했다.

“애가 없어졌어요. 혹시 같이 있는 거 아니에요? 알만한 데는 전부 수소문해 봤는데, 애가 전화도 안 받고, 정말 속상하네요. 우리 애 좀 찾아주세요. 부탁합니다.”

힘들었다. 걱정되어 그녀 어머니 부탁대로 찾아다녔다. 그녀가 다녔다는 세브란스 병원에도 가 보고 동작대교에 레스토랑도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4호선을 타고 그녀랑 다니고 내렸던 곳을 다 훑었다. 그녀의 행방은 묘연했고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정말 막막했다.

원래는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면 전에 알든 번호기록들을 베껴오기 마련인데 싹 지워버리려고 마음먹었기에 그녀의 번호도 없었다. 그녀 어머니를 통해 번호는 다시 받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가는데 처음에는 안 받다가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버튼을 눌렀을 때 긴 신호음 뒤에 그녀의 ‘여보세요’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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