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름에 피는 꽃. -3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걸까?

by 이규만

전에 없이 미경이가 만나자는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정말로 내게는 돈이 딱 천 원짜리 지폐 한 장뿐이 남지를 않았다. 정식으로 나오는 휴가가 아니라서 휴가비도 없었고 하 병장한테 겨우 꿔서 나오던 참이라 정말로 돈이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장을 한 모습을 보니까 벌써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그런 감회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버스를 탈 때는 미경이가 잔돈이 있다며 미리 준비해서 다행이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녀는 슬쩍 눈짓하며 내 눈치를 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왔다. 버스를 타자고 해서 버스를 탔고 자리가 하나 나서 앉으라고 했더니 앉았다. 휴가 나와 전화해 ‘만나자’ 먼저 말하는 것도 나였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확인해 보는 절차를 거치기 위해 카페로 안내하는 것도 나였다.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미경이었다. 내게는 돈이 없었다. 여자가 돈을 낸다고 하여 그리 흉 되는 것도 없었건만. 그리고 진작부터 능글능글하게 대해도 웃어넘겼을 것이다. 미경아. 나 돈 없으니까 네가 찻값 내라. 그렇게 해도 안 내는 그녀도 아닐 텐데. 그런데 나는 더 급박해지고 초조해졌다. 겨울인데도 군복이 더웠다.

뻔히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돈을 쓰게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이다.

결국에는 생각해 낸 것이, 병철 형이었다. 경원대 서양미술 학과의 그림 그리는 작업실로 데려가 그가 즐겨 먹는 원두커피를 로스팅해 달라고 하면 그도 그리 싫어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상병 휴가 때, 그를 만났을 적에는 한창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군대는 나보다 훨씬 먼저 가서 제대하고 복학한 지도 꽤 되었었다. 한 해를 넘겼으니 4학년이고 졸업작품전에 낼 그림 준비에 거의 학교에서 살고 있다시피 할 것이라는 예상한 것이다. 학교 작업실에 연락하지 않고 불쑥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줄지 의문이었다. 작은형처럼 굴지나 않을까. 뭐야. 연락도 없이. 더군다나 얼굴도 한번 보인 적 없는 여자를 데리고 가 서로 맞대는 경우도 결례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병철 형이 그 시각에 작업실에 있는가가 난제였다. 밤새다시피 한다. -일찍이 알았다. 그렇지만 그림쟁이 부엉이가 있는 시각치고는 꽤 이른 때였다. 다른 약속이나 볼일 있어 나가 작업실에 없으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나. 미경은 모른 척이었다. 버스가 성남으로 가는 동안만이라도 여유를 찾기 위해 버스 차창으로 입김 불어넣어 희뿌연 김이 서려 있는 곳에 손가락으로‘미경이 바보’라고 썼다. 봐봐. 이것 보라고. 그녀가 그걸 보더니 조그맣게 웃었다. 나도 같이 따라 웃었다. 기분이 그렇게 썩 나쁘지 않았다.

버스가 대유 공전을 지나고 경원대에 다다랐을 때는 운명의 초침이 다 된 것처럼 초조해졌다. 미경한테 말했다. 내리자. 성남시 내에서 내릴 줄 알았던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왔다. 형이 있어야 할 터인데. 정말로 있어야 하는데.

미대 학사(學舍)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게 해 놓고 병철 형을 찾아 예전 기억을 더듬어 대형 화판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결국에는 그를 찾았다. 열심히 나무뿌리 모양의 추상화를 온통 청색 계통의 색깔로 캔버스에 붓질로 다듬고 있었다. 형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몹시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어? 웬일이야? 벌써 병장 달았니? 말년휴가 받았구나.”

“아니요. 말년휴가는 아직 멀었어요. 위로 휴가 비슷한 것 며칠 받고 나온 거예요. 반가워요. 형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정말 걱정했었다고요.”

“아니. 왜?”

“실은….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거든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헤이즐넛 커피 두 잔 부탁해요.”

병철 형은 크게 웃으면서 반겼다. 그의 뿔테 안경이 내려앉을 정도였다. 그래. 얼른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라. 마침 커피 한 잔 마시려고 하려던 참이었어. 그는 커피 여과기를 만지작거렸다. 다행이었다. 한참 그림에 몰두했었을 텐데. 마침 힘들었던 차에 내가 온 것인가. 뜻밖이었다. 전에도 오랜만에 보면 반기기는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환대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여자’라 하니 내가 사귄 여자는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었을 것이리라.

미대 학사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경을 병철 형 작업장으로 안내하였다. 그녀에게 내가 형 이야기는 한 적은 있지만 그 인물에 대해 실지로 얼굴을 대하는 것은 처음이라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저씨. 좀 언질이라도 주질 그랬어요. 참 엉뚱하기는.

“병철이 형. 제 여자 친구 미경입니다. 예쁘죠?”

“그래, 예쁘구나. 언제 만난 거야? 둘이 잘 어울려.”

미경이는 머리를 숙여 다소곳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가 권해주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 안고 향을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보시다시피 사는 게 이래. 지저분하지?”

“지저분하긴요. 캔버스나 유화물감이 널려있어야 작업장 같죠. 얼마나 멋있다고요.”

“누가 너한테 물어본 거니?”

병철 형은 미경이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는 머쓱하며 실실 웃었다. 미경이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제 점점 동화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나와 병철 형만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한창 옛 시절 떠올리며 화실 일을 들먹거렸다. 데생 실력이 아무래도 미진하기만 하여 그리다 말다 했었다. 결국은 화실을 뛰쳐나갔던 나를 상기시켰다.

“병철 형. 많이 속 썩였습니다.”

“그래.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너 같은 녀석이 없었지.”

“이런 기회가 또 오면 좋겠어요. 그때는 미경을 모델 삼아 초상화를 하나 그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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