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신 미경일까, 미경친구 종임일까.
전에 미경이가 먼저 만나자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보다 더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게 가슴이 떨려왔다. 미경이와 나의 사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여자가 두 번째의 만남에서 불쑥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이 어색했다. 나에 대해 그녀가 미경과 숨김없이 나누는 사이라면 내가 휴가를 나와 맨 끝날 미경의 부탁을 거절한 부분도 말했겠지. 실은 부탁도 아니었다. 자신이 갑작스레 준비한 선물도 아니었고 내가 떼를 쓰다시피 주라던 음반을 사서 그날 주겠다는 것뿐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 사이가 틀어져 오가는 것 없이 잠시 침묵인 것도 잘 알고 있을 터. 그녀는 나와는 오래 만나 온 사이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거리고 있는 나를 바라봤다. 시선을 맞추기가 불편했다. 커피 맛 근사하죠.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그녀는 매우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또 그 짧고 긴 여운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자신이 가져온 배낭 가방을 뒤졌다.
“미경이가 몹시 아파요. 그래서 제가 대신에서 ‘조지 윈스턴’을 가져왔어요. 미경이가 너무 아파서 회사도 며칠 나오지 못했거든요. 몸살감기였나 봐요.”
그제야 비로소 미경이의 안부를 물을 수가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나요?”
“뭐가요?”
“미경이가 아픈 거 말이에요.”
“일주일 전부터 그런 것 같았어요. 며칠 전에는 병원 신세도 진 것 같았어요. 병문안 가려고 했었는데 의사가 과로가 겹친 것이니 집에서 푹 쉬면 나을 거라 했대요. 안 아팠으면 면회같이 와서 음반 테이프도 주려고 했던 것 같았어요. 저한테 간곡히 부탁하더라고요. 혼자서 가서라도 테이프 좀 전해달래요.”
“그랬었군요. 어쨌든 고마워요. 그리고 미경한테 저는 잘 있다고 해주세요. 미경이가 무척 아프다니 걱정이 되네요.”
종임이 나에게 시선을 맞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른 곳에 눈을 두었다. 이내 한숨을 조금 내쉬더니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참.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도 꽤 힘들게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미경이를 말하니까 이제야 말문을 여는군요.”
“…….”
어떻게 할지 난감하였다. 두 번째 만나는 시점에서 여자가 내게로 취해오는 행동이나 말들이 너무나 당혹스럽게 하는 것들이었다. 미경과 나의 사이가 소강상태임을 틈타 종임이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미경을 다 안다고 장담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한 번쯤은 자신의 속을 후련히 털어놓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여러 번 편지에다 표명한 바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미경과 술을 마셔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술이 익숙하지 않은 때였다. 그 매개체가 생각나기도 전에, 서로를 느끼기 전에 헤어지기 바빴다. 그릇된 오해들만 수북이 쌓아 갔다. 그저 의무감에 얽매여 얼굴이나 한번 비춰주면 되겠지. 잠깐 만나는 사이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사이가 틀어져 멀어졌다, 껄끄러웠다. 내가 가장 군 생활에서 힘들었던 부분을 억지로 이해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누군가와 새로운 만남을 섣불리 시작할 이유가 없었다.
종임이 아침밥도 거르고 왔다는 말을 상기시켰다. 잠깐 요기라도 하자고요. 군매점으로 안내하였다. 먹자는 말에는 생기가 돌았다가 매점에 오자 그녀는 적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식당으로 데려가는 줄 알았어요. 안 그래도 군인들이 먹는 밥을 한번 먹고 싶었어요. 그럴 기회를 주지 않나요.”
“그러면 지금 다니는 직장 그만두고 시험을 치러서 여군으로 입대하면 얼마든지 군대에서 주는 밥을 원 없이 먹을 수 있지요.”
종임은 처음에 나를 대했을 때와는 달리 쾌활해져서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한쪽 손으로는 입을 가렸다. 위트가 섞인 말들을 억지로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 말이 좀 전의 분위기를 싹 바꾸고 유쾌한 이야깃거리로 이어졌다. 이내 그녀는 내 곁에 바짝 다가와서는 내 팔을 살짝 비틀어 꼬집었다. 종임의 이러한 행동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어색하지 않다는 것에 놀라웠다.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꽤 오랫동안 만나 온 연인 사이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거였다.
“그래도 그렇지. 손님인데 군용 잔 밥을 드리면 예의가 아니지요.”
“피엑스가 문을 닫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지난번처럼 대화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니어서 말이죠. 그렇죠? 그래도 섭섭했었다고요. 그날 대접 못 받은 것 휴가 나와 갚아준다고, 해서 은근히 기다렸는데 연락도 하지 않고 미경이만 살짝 만나고 가셨어요? 너무 하셨어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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