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에 무슨 일을 해야하나. 걱정이다.
너무나 어이없고 웃기는 경우였다. 시험대에 올려놓고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한껏 우위에 서서 바라볼 욕심이었다. 은밀한 동조와 갈채를 받기를 고대하면서 제대해 나간 선배에게 혹은 후배에게 군대를 겪지 않은 그 외의 사람들에게 작은 비웃음을 치며 말하려 들었다. 나는 절대 여자에게 차이지 않았다. 단지 여자가 내게 소식을 전하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부대는 주말이면 면회객들이 붐비고 가족들의 웃는 얼굴들로 생기가 넘쳤다. 그 옆에 위병소 앞으로는 산이었고 민가 몇 채와 작고 낮은 아담한 성당도 있었다. 연병장을 지나 막사 뒤로는 낡고 낮은 박달나무를 굵은 철사로 연결해 놓은 담이었다. 그 담을 넘고 몇 발자국을 못 가서 바로 이십여 미터 깎아지를 듯한 바위 절벽이 펼쳐졌다. 외곽 보초 근무로 몇 번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절경을 바라보면서 마치 한 폭의 빼어난 동양화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바위 절벽과 아래로 낮게 흐르는 개울의 빠른 물살을 볼 때면 자유를 갈망하며 무인도에서 탈출하는 ‘빠삐용’을 연상(聯想)하였었다. 억압과 구속체제에서 눈여겨서 견줄만한 일은 못 되는 거 같다. 교도소와 군대는 확실히 다르지만 군대도 있는 동안만은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기에 내내 갇혀있는 기분은 영화 속과 비슷했다. 늘 외곽근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성당이 지어지고 몇 개의 민가가 들어선 것도 삼청교육대의 일이 훨씬 지난 후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소 벽에 희미하게 써진 낙서 때문이었다. 낙서에 간간이 그들을 상징하는 별명이나 은어들이 지저분하게 그려진 것들이 보였다. 꼭 시대적 근거로 남아 있는 흔적 같았다. 아마 보초 근무를 섰던 것은 기간 병이지 아닐까 싶다. 낙서의 흔적은 훈련병이 해 놓은 것들이 아니라 일반 병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적어 놓은 것들이 그렇게 많은 어록으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갇힌 그네들의 애간장을 끓게 했던 것이 박달나무 울타리를 넘어 벼랑을 지나, 또 밑으로 개울을 건너 암벽 위로 멀리 보이는 기차가 아니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향 생각을 하게 하는 디젤기관차 기적소리는 취침나팔 소리가 울리고 나서부터 훨씬 지난 후에도 가끔 꿈결같이 들려왔다.
그리움을 그대로 넘기지 못하고 잠을 못 이루었다. 결국에는 또 미경한테 편지를 썼다. 어슴푸레한 빨간 백열등 밑 내무반 나무 침상 위에 엎드려서 편지지를 부스럭거릴 즈음이었다. 마침 바로 선 아래 후임병인 하 병장이 불 침범 근무를 서는 중이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은 나를 놀리려고 하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 미경이가 답장을 안 하는 것은 내가 가끔 전화로 소식을 전하기 때문이야. 그렇다니까.”
“암요. 아무렴요. 그럼 저쪽에서는 박 병장님한테 마음을 전하는 것은 무엇 한 가지라도 있습니까? 이쪽에서만 전화하고, 매일 편지에다 정말 정성이십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는 일기라니까.”
다른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하면 그는 그만 좀 하라며 실실 웃고 있었다. 전 같으면 어지간히 질려 있는 터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다가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다른 날 같으면 편지를 쭉쭉 거침없이 썼을 것이다. 이제 군 생활도 얼마 남지도 않은 상태에서 답장도 없는 편지를 쓰고 있자니 갑갑해져 왔다. 지쳤다. 더군다나 전번 훈련 때 잠깐 밖에서 그녀한테 전화로 헤어지자는 말을 한 내가 아니던가. 구차한 변명들만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내 침상에서 마주 보이는 송 일병 보급품 대에서 톨스토이를 보았다. 전에 못 보던 거였다. 아니면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이라 이제 사 눈에 들어온 것도 몰랐다.
아침에 점호가 끝나자마자 그에게 그것을 좀 볼 수 없나 하자 그는 기꺼운 표정으로 빌려주었다.
"톨스토이를 좋아하나?"
"네. 여자 친구가 선물한 것입니다."
"좋은 여자 친구를 두었군. 면회는 왔었나?"
"안 왔습니다."
"어떨 거 같아? 그 친구가 자네는 오래갈 거 같아? 아니면 돌아설 거 같아?"
“모르겠습니다. 대학 다닐 때 같은 과였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글렀어.”
“네?”
“확실해야지. 아니었으면 아니다, 지. 아니었던 것 같다는 뭐야.”
“네. 그렇습니다.”
그냥 웃고 말았다. 여자 이야기를 더 하려다 말았다. 내가 확실하지 않은데 다른 누굴 붙들고 타당성을 논하고 말을 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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