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분노조절장애 자가 진단법에 관한 보고서. -2

피아노곡이 울려 퍼졌다.

by 이규만

가라앉지 않았다. 약을 먹어도 소용없었다. 그들 둘은 나를 속이기 위해 벌써 통화하고 입까지 맞춰 놓은 상태일 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새벽까지 잠이 오질 않았다. 못 기다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야.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채 가기도 전에 바로 받았다. 역시 성종과 통화를 하여 내 이야기를 듣고 그녀도 잠을 못 이루고 있던 것이다. 새벽이고 화난 상태에서 통화하면 목청이 커지고 시끄러울 것 같았다. 메신저로 이야기해.

성종한테 만나서 다 듣고 왔다. 얘기해라. 나는 일부러 유도했다. 다 아니까 솔직히 말해라. 첨엔 아니라 극구 부인하더니 결국은 얘기가 나왔다. 톡에 말이 올라가는 것이 한참 더뎠다. 정말 다 이야기한 거야. 성종이. 그래. 이제 확인하는 거야. 내 답변이 가고 또 수십 초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막막한 흐름이 느껴졌다. 그러다 일을 치른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날 둘 다 술에 완전히 취해 모텔에 갔다. 역시 그게 서로의 본능이었다. 짐짓 내가 예상하고 불안해하던 일이 그대로 맞아서 떨어지니까 온 사방이 칠흑으로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술이 확 깨 십 분 만에 나왔다고. 정말 그게 다야? 정말? 지금이라도 성종한테 물어볼까. 다그치듯 말을 빨리 쳐서 올렸다. 어느 순간 내가 말을 하는 것보다 빠르게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나는 다급해졌다. 순순히 수아는 늘어놓았다. 체념하듯이. 둘이 결국 집에 가서 관계를 맺었어. 휴대전화의 창이 붉었다가 까매졌다. 수아의 노란 말풍선도 들떠서 변색했다. 나는 다음 답변을 못 했다. 망치로 둔탁하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또 숨이 격하게 몰아쳤다. 내가 수아네 집 아파트 바로 앞에서까지 서성거리고 있는 동안 둘은 한창 거사를 치르고 있었다니.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격랑을 헤맸다. 부르르 손까지 떨렸다. 휴대전화기를 몇 번이나 방바닥에 떨구었다. 여태 참았다가 통화까지 한다면 목소리만 더 커져 이 새벽에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소릴 지를 것 같았다. 글자로도 차마 읽지 못할 진짜 쌍욕을 다 퍼부었다. 에이. 더러운 년. 나랑 끝내. 이제 연락하지 말자.

성종 녀석이 이야기할 때부터 낌새를 알아차렸지만, 관계까지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었다. 그런데 나와 성종이 그 일로 만났던 것을 그녀에게 밝히자 확인차 그러는 줄 알았나 보다. 성종이 내게 다 밝힌 줄 알고 그대로 그녀는 이실직고해 버린 것이다. 그때 생각이 들었다. 사람 죽이는 게 이래서 생기는 거구나. 이 친구 진짜 죽여 버려야겠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부터 득달같이 녀석에게 따지려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도 않았다. 통화를 할 수 없어 답답해진 나는 문자를 보냈다.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더 들어보자. 무얼 더 속이려고 궁리하고 있는지.’ 아무런 답문이 없어 문자를 한마디 더 보냈다. ‘너 죽고 나 죽자.’ 새로 사 온 담배를 다 피웠다.

힘들다. 결국 술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건가. 정말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이때 쓰는 거 같다. 나는 질질 짰다. 그러다 웃었다. 히스테리를 부렸다.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 중에 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벌써 한 바가지 눈물을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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