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름에 피는 꽃. -7

지난날에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정. 그리움.

by 이규만

화실 개업 첫날 형에게 나도 다른 이들처럼 그렇게 비싸지 않은 화분을 선물했다. 화실 복도에 줄지어 있는 화분들이 걸려있는 그림보다도 많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화분은 하나둘씩 없어지고 그림이 더 많아질 것이다. 화분에 심겨 있는 금전수가 말라비틀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복도를 지날 때마다 내가 준 화분을 쳐다봤다. 화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단대동 시장 화원에서 고른 거였다. 화분을 고를 때 그 식물의 이름을 몰랐는데 화원 주인이 알려줘서 알았다. 보통 가게 개업할 때 선물하는 화분이에요. 금전수가 원래 돈 나무 불러요. 돈 많이 벌라고 선물한대요. 하긴 화실도 사업인데 돈 많이 벌어야지.

일하고 돌아와 지치고 힘든 몰골로 화실서 그림을 그리면 이젤 앞에서 조는 경우가 많았다. 기본기에 충실해지려 기본 석고에 매달렸다. 아그리파. 비너스. 줄리언.

마침 미경이의 생일이 떠 오른 것이 다행이었다. 미경을 제일 처음 감동하게 했던 것은 생일날 꽃을 선물한 것이다. 꽃만 선물하기에는 없어 보이는 것 같아 새로운 것을 구상했던 것이 그림이었다. 내 그림을 미경에게 선물할 결심이 이르자 더 이상 이젤 앞에서 조는 일은 없었지만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다. 병철 형은 그런 나를 꾸짖었다.

“또. 또. 옛날 버릇들을 드러낸다. 감각적인 면에 자꾸 치중하지 말라니까.”

피곤함에 절어 병철 형 말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쉬고 싶다. 간절함이 강하게 귓전을 때렸다. 감기는 눈꺼풀과 내 그림을 받고 기뻐하는 미경이의 모습이 보이더니 갑자기 목에서 통증이 가해졌다. 마치 힘줄이라도 끊겨 나가는 통증이었다. 목을 돌리면서 가해지는 통증을 참으려고 고개를 뒤로 제겨냈다. 순간 그렇게 뻣뻣하기만 하던 목에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는 코에서 뜨끈한 액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머! 병철 선생님! 코피예요! 코피!”

그 소리에 나도 깜짝 놀라, 감겨 있었던 눈이 크게 뜨여 정신이 번쩍 났다. 주위에 모두가 나를 주시 중이었다. 코피를 흘리는 장본인이 바로 나구나. 한 여학생이 나를 눈여겨보다가 갑자기 흐르는 코피에 놀랐던 모양이었다. 병철 형이 다른 학생을 가르치다 놀라서 휴지를 들고 달려왔다.

“너무 무리한 모양이다. 그래. 좀 쉬었다 해라. 승동아. 그게 좋겠어.”

부끄러운 점도 있었지만, 코피를 열심히 닦는 동안 그래도 목이 그렇게 시원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병철 형은 계속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미경한테 그림을 생일선물로 주는 일은 글러 버린 것만 같았다.

생일날 -의미 있게 감동의 여운을 전해줄 만한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그린 좋은 그림 줄까 -생각해 보았지만 내가 그리지 않은 그림을 준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국민배우 안성기가 그려진 십육 절만 한 패널이었다. 군에 있을 때 추억 록에 그려 놓았던 것을 잘라내어 만들었다. 거기다가 그리 화려하지 않은 색상으로 고른 립스틱을 끼워 넣었다. 안성기는 좀 그랬지만 립스틱은 근래의 화장이 짙어진 미경과 잘 어울리는 선물이었다. 마치 물건 사면 본 물건보다 부록이 더 돋보이는 때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새로 그려진 것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부진한 실력이 그에 이르지 못했다.

회사 앞에서 전화하고 무작정 나오라 일렀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설렜다.

생일이지. 축하해. 그녀는 말년휴가를 나왔을 당시에 만남이 질퍽하고 내내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유지되었던 것인지 전화를 받아 통화할 때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만나서 선물을 받아도 미경은 썩 밝지를 않았다. 말 안 하면 지나치는 생일을 뭐 하러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떠드나. 딱 그 표정이었다. 미경은 한참 먼 거리를 두었다. 모든 것을 다 처음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선물을 주는 나와 받는 미경이나 서로 흡족해야 하는데 시무룩하게 심드렁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회사 앞이 그렇게 심하게 분위기가 싸한지 정말 끔찍했다. 아마 내가 뒤돌아서고 나서 미경은 그 그림 선물을 끌러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을 거 같았다.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역시 이러한 상태라면 한참은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내도 나을 뻔했다. 군대에 있던 거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선물을 하고부터 미경의 표정을 읽은 나는 초조해졌다. 또다시 참지 못하고 꾸역꾸역 전화질이었다. 그 허물을 덧씌운 미련은 가시지 않고 남아 나를 괴롭혔다. 연애라는 것이 손익계산서를 첨부하여 딱딱 한 푼 에누리 없이 맞아떨어지는 것이라면 어차피 미련 따위조차 없었을 것이다. 미련과 다음으로 그 의외의 것들은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 예감이라는 녀석은 조급증에 현명하게 자리 잡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전화를 하면 그녀의 심리상태가 안 좋을 것이고 내 허물만 보이고 그녀에게 줄 것은 실망밖에 없을 것이다. 예감했다. -예감은 이상하리만치 묘하게 너무도 정확하게 적중했다.

그랬다.

용역회사에서 청주를 내려갈 지원자를 뽑을 때부터 별로 안 좋았다.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따라는 나섰다. 터미널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리니까 오후 한 시가 막 넘어섰다. 인력시장에서 일하는 인부라면 적어도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건만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각이 훨씬 넘어섰다. 아파트는 다 지어졌고 경계석을 놓고 주변 정리를 하는 정도의 일인 것 같았는데 건설 직영회사에서 우리 일행들을 눈꼴시게 본 모양이었다. 하청준 업자에게 잔소리해 대는 바람에 그대로 다음 날 돌아가라는 전갈받았다. 일당도 받지 못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여관에서 일행들과 있자니 처지가 너무도 한심하고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미경이에 전화했다. 느낌이 안 좋았다. 그래도 혹시나 그녀가 다르게 나올 수도 있어. 손톱만큼의 위안으로 삼으며 장거리로 성남에 전화를 넣었다. 그녀의 밝지 않은 목소리가 전과 달랐다.

-어디예요?

-청주.

-아니. 거기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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