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름에 피는 꽃. -9

누아르의 분위기가 흐르는 '미스터 갱'이었다.

by 이규만

그러다 너무도 뚜렷이 미경이 종임으로 바뀌었을 때는 가슴이 뻥 뚫리듯 허전해 상실감마저 밀려왔다. 옷 입는 스타일이나 외양이 전혀 같다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거의 화장도 그렇고 회사에서 입는 유니폼을 보게 될 때가 가장 그랬다. 몸짓까지도 닮았다. 종임이 군부대로 혼자 면회를 왔을 때는 머리를 단정히 빗어서 뒤로 묶었고 눈빛은 불안한 듯 무엇인가 쫓기는 표정에다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최대한 잘 보이려고 조심하고 바짝 긴장한 모습이 스쳐 갔다. 비교하자면 그전과는 달리 지금은 매우 편안하고 꽤 밝아 보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했으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구나. 미경이 더군다나 회사를 그만둔 상태가 그녀에게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같이 보이는 거였다. 연정 상대가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임은 겉보기가 많이 달라져 갔다. 머리는 훨씬 길어져서 주체 못 해 묶지 않고 포트 스트레이트파마 식으로 약하게 볶은 결로 어깨에다 흘러내리듯이 풀어헤쳤다. 옷도 바지보다는 치마나 스커트 정장 차림을 입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좀 의도적으로 연출하려는 것이 역력해 보여도 가끔 바람이 불 때면 손으로 정리한다거나 고개를 흔들어 단정하게 하려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러다 종임에게서 미경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계속 찾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종임의 겉모습이 약간 달라져 가면 갈수록 미경과 보냈던 시간과 편지를 썼던 내용들이 애절해지고 간절하기조차 했다.

큰 유리창으로 훤히 들이비치는 비커밍 카페에서는 종임이 책을 들고 창가 쪽에서 기다리는 뒷모습은 너무나 미경이의 뒷모습과 흡사해서 나는 하마터면 종임을 미경아. 미경. 애. -부를 뻔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금방 뒤돌아선 그녀는 미소를 지었고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안겨 올 태세였다.

군대서 휴가를 나와 미경을 만나 커피는 줄곧 마셔도 시간에 쫓기듯 헤어지기 바빴다. 그쯤에 바람이 있었다면 다른 연인처럼 가보지 못했던 극장이란 곳도 가보고 저녁도 같이 먹고 술도 마셔 보고 싶었다. 내가 병철 형한테라도 이런 말을 하면 앞뒤 상황을 몰라 이상하게 볼지 모른다. 사귄 지가 언제인데 아직 밥을 같이 먹거나 영화를 본 일이 없어. 말이 돼? 미경과 훨씬 가까워지기 이전에 입대가 있었고 입대 이후에 서로 헤어져서 있는 시간으로 인해 더 이상 만남이라는 것을 갖지 않는 상태로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지나고 군 전역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미경과 나는 정말 서로를 생각하는 시간과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같이 보내는 때를 몰랐었던 것은 아닌지.

종임은 참신하고 성숙미가 남달랐다.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십 대 여자로서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느꼈다. 다른 마음 한쪽에서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수없이 추슬렀고 강하게 부정했다. 결국에는 미경과 또 다른 이면의 미경을 만났다. 어느 순간 정신이 퍼뜩 깨듯 정신 차리고 보면 미경이 아니라 종임이라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고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만나고 즐기고 있는 것이 됐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런 세세함까지도 모두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여자 -김 종임. 과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확신이 서질 않았다. 계속 만날수록 분명히 나는 종임의 속의 것을 만나지 않고 겉껍질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느낌들 -종임한테 발설했다가는 미경과 헤어지자 해 놓고 금방 만나자는 말을 번복하는 거와 다름없었다.

종임과의 만남에서는 미경과 비교를 해야 하고 그녀를 벗어나지 못했다. 미경이하면 종임이고 종임이하면 미경이었다. 종임이 혼자일 때는 없었다. 순수하게 종임만은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미 지났다. 군대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가 종임을 새롭게 대하고 여자로 느꼈다.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 시절을 자꾸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때의 그녀는 이미 사라졌고 헛갈리게 둘 중 하나였다. 괴로웠다.



양재역은 바로 강남역과 이어지는 길목이라서 샐러리맨들이 많았다. 이른바 넥타이부대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가 조금 소강상태를 보이다 저녁때가 되면 붐비는 것이다. 그 분위기를 부흥하듯 간이 포장마차를 꾸미고 샌드위치나 핫도그같이 분식을 파는 곳이 많았다. 아침밥을 거르고 나온 이들이 많다는 것을 적절히 포착한 또 하나의 노점 권 블록이 특수를 누렸다. 김이 모락모락 서려서 나오는 포장마차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매번 만날 때마다 종임은 나의 팔짱을 끼고 떡볶이도 사 주고 붕어빵 하고 어묵도 사 주었다. 종임은 식도락가 그 이상이었다. 맛에 관한 한 전문가가 부러워할 정도로 식견이 넓었다. 종임은 가는 곳마다 한편씩 맛의 리뷰를 일러줬다. 이 집은 떡볶이에 고추장을 자신들의 집에서 직접 담근 걸 써서 맛있고 저 집은 어묵 국물에 특히 신경을 써서 무맛이 독특하다. 나는 옆에 서서 대답하며 건성건성 들었다. 그렇군. 아. 예. 또 한 집은 붕어빵을 굽는데 바짝 구우면서도 타지 않게 구워요. 입에 달라붙는 쫀득쫀득 함 잃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쓰거든요. 붕어빵을 먹을 때는 혓바닥을 고루 입천장 쪽으로 가만히 놀려 보아요.

대충 그런 식이었다. 종임은 한 편의 음식 논평을 곁들였다. 길거리 음식문화를 제대로 누리려면 이 어묵의 깊은 맛을 먼저 음미해야 진정한 연애 참 맛을 즐길 줄 아는 거예요. 마치 자신은 다른 남자하고 연애를 해본 양 경험이 있는 여자처럼 굴었다. 그녀가 지금 나랑 이렇게 어묵을 사 먹는 걸 연애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가 방금 떠 준 종이컵에 뜨거운 어묵 국물을 마시면서 인상을 약간 찌그렸다가 붕어빵을 하나 집어 들고 나를 볼 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붕어빵에는 붕어가 안 들었죠?”

“음. 그건 말이죠. 단지에….”

내가 대답을 못해서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붕어 한 마리가 벌써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가 오물거리는 모습이 막 싱싱한 횟감이 입안에서 씹히며 파닥거리듯이 보였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이규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쓰고 또 쓰고 계속 쓰는 중입니다.

65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6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6. 여름에 피는 꽃.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