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는 다양한 전공을 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물론 요즘은 다른 업계에도 꼭 전공을 살리지 않고도 일하는 사람이 많고, 문과생이 코딩을 배워 개발자의 세계로 뛰어들기도 한다.
나는 일본학을 전공하고 물류학을 복수 학위로 받았다. 내가 방송사 입사 준비를 할 때 엄마는 이런 말을 했다. "그럴 거면 신방과 갈걸~ 일본어는 쓸 일도 없겠어" 나는 곧장 '배워두면 쓸모없는 것은 없다'라고 응수했지만, 내심 여행할 때나 일드를 보면서나 써먹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어느 날, 아나운서 채용이 열렸고 나는 고배를 마셨다. 그런데 외주 프로덕션 피디가 나를 따로 불러냈다. 아까 카메라 테스트에서 인상적이었다며, 고용주가 원하는 콘셉트와 맞지 않아 널 최종 선발하진 못했지만, 오래 보고 싶다면서 내 이력서를 들여다보았다.
“일본어를 했네? 내가 구상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나중에 현정 씨랑 같이 해보고 싶어서요. 일단 내 친구가 사람 하나 구하고 있는데, 그 일부터 좀 해줘요.” 그렇게 나는 첫 생방을 나가게 됐다. 그 프로젝트를 끝내고 얼마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 현장에 있던 협력팀에서 내 진행을 보고 다른 일을 하자고 연락 온 것이었다. 그렇게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업계로 뛰어들어 나만의 업무 네트워크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방송국에선 코너를 새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다른 동료들이 관광지 소개 등 비교적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코너를 만들 때 나는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한국과 접목해 그 언어의 유래와 고쳐 써야 하는 말 등을 소개했다. 신선하고 재미있고 무엇보다 딱 '너의 코너'라는 색깔이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돌이켜보면, 하등 쓸모없어 보였던 것들로 나는 나만의 커리어를 쌓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계획을 짠다. 나도 그렇다. 그리고 그 계획은 나름대로 각자가 생각하는 선에서 점들을 찍고, 그 선들은 올곧게 직선을 그리고 있다. 시기마다, 또 그 나잇대 사회가 요구하는 어떠한 적정선 안에서 말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내가 찍고자 했던 점은 그대로 가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튀어올라 중구난방 파편이 되곤 한다. 그리고 자칫 이렇게 생각한다. '망했다.'
하지만 그 정신없는 점들을 잘 이어보자. 그때 나만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별 모양이 될 수도 있고, 키치하고 독특한 그림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은 우리가 내다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아니 거의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주어진 삶 속에서 당장 그 점을 열심히 찍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