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항암제
*오늘은 한 사람과의 짧은 이야기를 전한다.
든든한 지원군에 대한 이야기는 브런치북 2권에서 만날 수 있다.
평소 나는 감성적인 편이지만 큰일이 닥치면 차분해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애쓴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감정보다 해결책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경험상 울고 난 뒤의 후유증이 오래가고 버겁다는 것. 혹시 누군가 내 앞에서 울게 된다면 나도 눈물을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눈물이 대성통곡으로 번져버린다면...그 순간 감정에 휘둘려 몸과 마음이 눈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깊고 어두운 슬픔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건네주려던 위로와 희망은 사라지고, 나는 축축한 감정의 상자 안에 갇힌 채 스스로를 끌어내는 것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누군가는 뒤늦게 소식을 듣거나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에 서운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다.
아주 작은 에너지조차 아껴야 하는 상황에서 관계와 감정의 조율은 잠시 미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병원 일정과 가정일 그리고 체력 유지를 위해 우선 몇몇 사람에게만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J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다녀오면 연락하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을 그녀였다.
"00아, 나 내과에 다녀왔어."
"언니, 목소리가 왜 그래? 문제 있대? 설마 암 이래?”
그녀 다운 직설법이다. 어제 만났는데 하루 사이에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통화를 했다. 전직 서울의 모대학병원 간호사 출신인 그녀는 적잖이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유지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치 병원 의료진과 상담을 하는 느낌이었다.
"좀 전에 서울에 있는 병원 두 곳에 예약을 했어. 다행히 진료가 빨리 잡혔어. 다음 주 금요일과 그다음 주 월요일."
"잘했어. 예약이 금방 잡혀서 정말 다행이다. 언니는 평소에 식단 관리도 잘하고 운동도 열심히 했으니까 수술 후 회복도 빠를 거야. 필요할 때 나를 많이 활용해. 안 그러면 나 진짜 인연을 끊을 거야. 우리는 가족과도 같으니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 말고 잘 활용해 줘. 언니는 앞으로 우울 금지와 오버 금지해야 돼. 절대금지! 난 언니가 사랑 듬뿍 받는 사람이라서 별일 없을 거라고 확신해. 로봇 수술보다 더한 수술이어도 어차피 아랫배야. 뱃가죽, 내장지방이라고."
하하하하하
절망의 순간에도 어김없이 빛을 발하는 매력에 잠시나마 암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언니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질질 짜지 말고 밥이나 잘 드시고. 분명한 건 수술 후에 중환자실 갈 일 같은 건 없으니까 걱정 말고. “
“언니 자신한테 집중해. 쓸데없는 생각 말고. “
그녀는 단단히 일러두었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메시지와 전화 통화, 잠깐의 만남으로 날마다 유쾌한 심리치료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서울 병원에서 조직 검사 슬라이드를 빨리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오늘 오후까지 제출해야 한대. 혹시 시간 괜찮아?"
"당연하지. 집 앞으로 언니 모시러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운전 힘들 텐데 미안하다."
"드라이브 삼아 가는 거지. 오며 가며 얘기도 하고 좋잖아. 소풍 간다고 생각하고 언니는 냉이김밥 싸와."
덕분에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젯밤에도 남편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고, 그렇게 매일 울면 어떡하냐고 남편이 걱정했다고, 잠을 잘 못 자서 두통이 더 심해졌다고, 그러니까 치료 잘 받고 얼른 나아서 건강하게 오래 함께 살아가자고 했다. 그녀가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나를 원망하거나 걱정하고 있음을 생색내는 게 아님을 다 안다. 우리는 생각이 연결된 관계니까.
그녀는 슬프고 힘든 상황도 유머와 재치 있는 말로 승화시키는 매력의 소유자다. 이번에도 평소처럼 나에게 최고의 심리치료사 역할을 해줬다. 덕분에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정작 그녀 자신은 나 때문에 눈물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이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운전하면서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미안하고 고맙고, 눈물 나게 감사하고 사랑스러워서.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란 함께 만들어가는 교집합이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는 적당히 힘을 빼고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삶을 어루만지며 살아간다. 수다와 웃음으로, 칭찬과 격려로, 충고와 조언으로, 축하와 선물로, 울음과 위로로 우리는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배우고 나눈다. 그 덕분에 삶이 더 즐겁고 풍요로워진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타인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암과 함께 살아가면서 관계에 대한 소중함을, 그 귀한 마음을 더욱 절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서울의 00 병원으로 항암방사선 치료를 다니기 위해 서 암 요양병원에 입원을 했다.)
암과의 전쟁에서 두 번째 선제공격도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