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어쩌면 식탁의 주인공

by ligdow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음은 벌써 마트로 향한다. 얼른 맛있는 김치를 담그고 싶어 안달이 난다. 3월 중순쯤이면 로컬푸드 진열대의 어린 열무들이 “어서 나를 데려가 달라”라고 속삭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이보다 더 신나는 취미가 또 있을까. 그와 그녀들이 맛있게 먹어줄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양손은 묵직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치 봄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듯 가뿐하다.

이것이 내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다.




암 이후, 음식 관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어떻게 먹을까‘였다. 철저한 음식 관리가 필요한 고단함 속에서도 참 다행인 것은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따로 육수를 내진 않는다. 정수기 물을 사용하고 천일염과 새우젓 혹은 멸치액젓으로 간을 맞춘다.

설탕 대신 약간의 매실액과 사과, 배, 양파를 넉넉히 갈아 넣는다. 과일과 양파가 주는 은은한 단맛은 발효를 도와 김치가 익을수록 국물 맛을 시원하게 만든다.


음식 관리 중이라 양념을 과하게 하지 않는데 그 덕분에 열무의 풋풋한 내음과 알타리의 알싸한 단맛이 더 살아난다. 양념을 줄이니 맛이 훨씬 시원하고 깔끔해져서 좋다.


봄부터 가을까지 일주일에 한 번은 열무김치를,

2주에 한 번은 알타리김치를 담가 김치냉장고를 채운다. 봄이 되면 내 열무김치를 찾는 지인도 있어 넉넉히 담가 나누기도 한다.


초롱무는 지난가을에 처음으로 담가봤다.


나는 초록이들을 다듬을 때 행복하다. 거추장한 것들을 툭툭 덜어낼 때면 내 마음속 소란도 함께 가라앉는 것 같다. 코끝을 스치는 흙냄새와 단단한 알타리의 촉감이 기분 좋다.


밀가루나 찹쌀가루로 풀을 쑤고, 붉은 고추는 너무 곱지 않게 적당히 갈아 사용한다. 엄마는 열무와 알타리는 고추를 갈아 담가야 더 시원하고 맛있다고 하셨다. 나 또한 배운 대로 그렇게 담근다.


-무와 배추로 물김치를 담근다. 삼베주머니에 건더기 양념을 넣어 밤새 우려낸다.

-오이는 씨를 잘라내고 배추와 섞어 물김치를 담근다.


어떤 의사는 암 환자에게 물김치를 권하는데 자극이 덜하고 발효된 국물이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염분을 걱정하는 의견도 있어 나는 덜 짜게 담가 적당히 먹는다.



작은 애가 좋아하는 섞박지와 배추겉절이는 고춧가루로 매콤하게 한다. 섞박지는 베란다에서 익힌 후 냉장고에 넣는다.


잘 익은 파김치는 수육과 잘 어울린다.


시골에서 따온 붉은 고추를 갈아서 소분해 냉동실행.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고추는 다지기를 사용해 적당히 갈아주고, 풀을 쑤기 귀찮은 날에는 밥을 식혀서 사용한다.


작은 애는 어느 때가 되면 묻는다.

“엄마, 알타리 아직 남아 있지? “


맛있게 익었을 때는 김치국물로 무조건 열무소면을!

열무김치를 좋아하는 남편과 큰애를 위한 특식이다.





“우리 막내가 엄마를 닮은 게 맞네! 이제부터 박사라고 불러야겠어. “


2021년 여름, 엄마가 한 달 동안 우리 집에 계실 때 내가 담근 열무와 알타리김치를 드시고 박사 학위를 주셨다. 김치 담그기가 이토록 쉽고 재밌어진 것은 어쩌면 그때 받은 엄마의 인정이 내게 날개를 달아준 덕분일 것이다.


대체로 담백하고 심심한 반찬들 사이에서 잘 익은 김치는 한 끼 식사의 균형을 잡아준다. 때로는 김치 한 점이 주는 짭조름하고 개운한 맛이 멈췄던 입맛을 다시 깨우기도 한다.


고추장이 그렇듯 김치도 내 식탁의 기본이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조연이다. 김치를 담글 때마다 엄마가 지어준 ‘열무 박사’라는 다정한 이름표를 떠올린다.


직접 김치를 담그는 일은 정성껏 나를 돌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오늘도 아삭한 물김치 맛있게 먹었다. 그 한 그릇의 정성이 내일의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