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을 밥보다 좋아한다. 거봉, 딸기, 복숭아, 수박, 사과 등. 그리고 우리집에서 과일을 먹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상하게 과일을 사다 놓아도 다들 잘 먹지 않는다. 동생은 냉장고의 과일을 보고, 누나 꺼 아냐?라고 할 정도다.
환절기가 돼서 그런가, 급하게 몸이 안 좋아졌다. 컨디션이 저하되고 숨이 가빠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며칠 계속되자 결국 입맛도 없어져 버렸다. 하루에 한 끼를 물 말아서 대충 먹거나 계속 커피만 들이키는데, 오늘은 아빠가 마트에서 거봉을 사 왔다. 내가 좋아하는 거봉. 아빠는 한알도 먹지 않을 거봉.
아빠는 그 시대, 50년대를 대표하는 사람답게 전형적으로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다른 아빠보다 덜 상냥하고, 더 엄한. 우리에게 태어나자마자부터 '아빠'대신 '아버지'란 단어를 가르쳤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나는 아픈 뒤로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빠로 부르는, 아빠의 아픈 새끼손가락이다.
아빠는 늘 그랬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한참 지나서 와서는 말없이 초콜릿 봉지를 던져주고 가버리거나, 장난으로라도 사랑한다는 소리 한번 한 적 없다. 대신 우리를 부양하기 위해 애쓴 것은 안다. 하지만 그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기에 어릴 때는 남들과 다른 아빠에게 섭섭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빠의 얼굴에 주름이 더 생길 때쯤부터, 퇴직을 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 아빠는 우리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다 커버린 터라 아빠의 갑작스러운 관심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렇게 아빠와는 여전히 멀지만 가깝고, 또 가깝지만 먼 사이로 지내고 있다.
어제는 물말은 밥을 먹었는데, 오늘은 거봉 한송이를 다 먹었다. 나 역시 아빠에게 고맙다거나, 잘 먹겠다거나 하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 아빠의 그 딸이랄까. 하지만 껍질만 남은 그릇을 보면 아빠가 분명 좋아할 것을 안다.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거봉을 사 왔는지도 안다.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