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네. 또 창경궁에 가자.
- 올해가 지나기 전에 또 바다 보러 가야지.
- 나중에 여기 와서 같이 먹자.
- 다음 주에 일산 한번 들릴게.
- 내년에도 또 여기 오는 거야.
살면서 수많은 약속을 했다. 크고 작은. 어린날에는 그 약속에 함부로 영원이란 단어를 보탰다. 약속은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꼭 지켜야 하는 것. 꼭 지켜져야 하는 것. 지킬 수 없으면 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 약속들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버리고, 뻔한 말장난이 되어버리면, 가끔은 꼬여버린 마음으로 우습기도, 세상이 무너진 듯도 했다. 그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무엇이든. 그걸 알게 되고 나서는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려 했다. 가벼운 말들을 주고받지 않았고, 남이 던지는 빈말에도 진지하게 답하려 했고, 밥 한번 먹자라는 다정한 말에도 속으로 언제? 진짜? 하며 상대방의 진심을 살폈다. 그렇게 복잡하게 살던 나이가 있었다. 복잡하게 살기에, 놓치는 게 더 많았던 나이.
이제는 복잡하게 살지 않는다. 약속에 영원을 담지도 않는다. 쉽게 깨져 버리면 쉽게 또 하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약속을 마구 만들고 싶어 진다. 조만간 아침 10시에 여는 동네 브런치 가게를 친구와 가기로 했고, 추워지기 전에 바다를 또 보러 가기로 했고, 작년 가을에 창경궁이 너무 예뻤기에 창경궁에 또 가기로 했다. 10월 마지막 날에는 강화로 새우를 먹으러 가기로 했고, 제주에 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쥐치 조림을 먹어보기로 했다. 가을바람맞으며 야외에서 노닥거리던 기억이 좋아 시원한 바람이 불면 광화문 그곳에도 가기로 했다.
이제는 놓치지 않기 위해 약속을 한다.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많은 약속을 만든다. 너와 나 사이에는 이런 약속이 있어. 마치 무슨 증표처럼. 모두 지킬 수 없을지라도 빼곡히 만들어 품어 놓는다. 그리고 그 기대로 산다. 우리가 종류가 다른 브런치를 시켜 나눠먹고, 단풍으로 물든 창경궁의 호수를 바라보고, 바다 앞에서 캠핑의자에 앉아 바다를 구경하고, 새우 껍질을 까며 올해 새우 진짜 커,라고 말하는 장면을 생각하며.
이 글을 읽고, 내게 또 무언가 약속을 해올 사람들을 안다. 나는 또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