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에는 5살에 왔다. 신도시가 되자마자. 그전까지는 서울에 살았는데, 그 동네는 신기한 곳이었다. 어쩌면 다정의 뿌리가 그곳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언니는 매번 10원으로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 왔다. 나는 놀다가 약국에 들어가 손을 내밀면, 약사 선생님이 손에 올려주는 동그란 노란 비타민을 먹었다. 이게 무척이나 당연했던 동네. 물론, 아빠는 언니가 10원으로 가져온 케이크 값을 퇴근길에 매번 지불해야 했지만.
나는 그 동네의 서점 집 둘째 딸내미였는데, 집에서 서점을 가기 위해서는 시장을 지나쳐야 했다. 지나가는 길 모두가 불렀다. 백설이라고. 새하얀 얼굴 때문에 백설이. 내가 지나가면 두부 할머니는 꼭 불러서 어떻게 두부보다 더 희냐, 하며 마치 친손녀처럼 안아주곤 하셨다.
서점 골목 끝에는 삼촌이 하는 카센터가 있었다. 그 시절 동네의 모든 사람들은 다 언니, 오빠, 삼촌, 이모였다. 미끄럼틀은 없지만 넓은 공터인 카센터 주차장에서 우리는 주로 숨바꼭질을 하거나 언니 오빠들이 하는 땅따먹기를 구경했다. 그렇게 한참 놀다 밥 먹으라는 엄마 말에 서점으로 돌아와, 단골 백반집에서 배달 온 음식을 맛있게도 먹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꼬막무침을 좋아하게 된 것이.
추운 겨울이 되면 엄마는 따뜻한 차나 커피를 타서 시장 할머니들께 가져다 드리곤 했다. 서점 구석 의자에 앉아서 발을 흔들며 멍 때리고 있으면, 좋아하는 연예인의 브로마이드를 차지하려고 달려오는 언니들을 구경할 수 있었고, 겨울이면 한가운데 난로 위에 밤을 구워 먹었다.
그 동네를 5살에 떠났고, 초등학생 이후에는 아빠가 서점을 접었으니 갈 일이 없었다. 그러면 이제는 흐릿해져야 하는 기억인데 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또렷해질까. 이미 모든 게 달라져있을 동네인데 왜 그대로일 것만 같을까.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시장길을 걸으면 누군가가 날 불러 세워 볼을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을 것만 같은 건 어디서 오는 향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