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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야기 16: 자유의 패러독스

by 이효재

<창세기 3: 6~8>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집요한 악플러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젊은 연예인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우리 사회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가린 채 어둠 속에서 청산가리 같은 맹독성 글로 인격을 모독하는 악행을 표현의 자유를 보호한다며 사실상 방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자유는 거짓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빛의 자유입니다. 거짓 자유는 두렵습니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자유의 투사들'은 공포스럽습니다.


거짓 자유는 행위에 앞서 먼저 마음을 왜곡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악한 행위를 실행합니다. 이어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깊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에덴동산에서 거짓 자유를 행사한 남자와 여자가 우리에게 이처럼 불행한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에게 그 나무는 독이 묻어있는 지극히 위험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에 우호적이었던 여자의 눈에는 그 나무가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유익해 보였습니다. 나무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나무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봅니다. 왜곡된 마음은 진리를 곡해합니다.


사탄은 여자에게 원하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독촉했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자유를 선동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먹였습니다. 악의 동맹입니다.

뱀의 말처럼 그들의 눈이 열렸지만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는 어리석은 개명(開明)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면 신처럼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줄 알았지만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서로의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웠습니다. 선악과 사건 이전에 그들은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위협당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나를 상대의 눈으로 보며 사랑의 연합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상대를 나와 대립된 존재로 바라보기에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서로를 지켜주려 하지만, 말씀을 어기는 사람은 나를 지키려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여자와 남자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무서워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죄에서 오는 본능적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내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자유는 거짓 자유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열매를 가로채는 악한 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불안과 두려움을 낳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해방의 기쁨을 주는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이웃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언뜻 형용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루터는 너무나 정확하게 참된 자유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될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짐에서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로운 삶을 향한 문이 열립니다. 우리가 그분의 종이 되면 자발적으로 이웃의 종이 되어 섬기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오랜 자기중심적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랑의 자유를 누립니다.


종이 되어 자유를 얻을 때 삶이 가벼워집니다. 밝아집니다. 확장됩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겁게 순종하는 사람의 삶은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의 삶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추락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갈망하는 자유의 패러독스입니다. (글/이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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