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를 키우기 시작하고는 몇달인가 지났다. 사람 사이에서의 기념일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터라, 달팽이를 집으로 들인 날짜 따위는 기억하지 않는다. 두마리를 주문했는데 세마리가 도착했다. 착오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녀석들의 영양상태를 봐서는 판매자가 달팽이를 그만 키우고 싶어하는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게 했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한마리를 더 넣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달팽이들의 크기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였다.
케이지는 벤자민의 것을 사용했다. 그가 죽고 난 후에도 그 케이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돌아보면, 일관성을 가진 내가 했던 행동이라고 생각하기엔 좀 의아한 일이었다. 아마도 나는 이전과는 달리 죽음을 받아들이는 회로가 조금 바뀌어버렸나보다.
달팽이들은 크기 순으로 프레스토, 모테라토, 라르고 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애정과 상실감을 가질 수 있는 행위이다. 애정의 기쁨보다 상실의 슬픔의 무게를 더 크게 느끼는 나는 그 간 사물이나 동물에게 이름을 달지 않았지만, 벤자민과의 만남과 그의 죽음을 통해서 내가 아닌 것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라르고'는 언젠가는 붙여보고 싶은 이름이었다. 고전게임인 창세기전2의 서브캐릭터 중 그런 이름이 있었고, 어감도 나쁘지 않았다. '천천히' 라는 의 음악적 의미도 달팽이라는 동물과 잘 어울렸으며, 에스카르고와 뭔가 비슷한 느낌이 든다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정작 달팽이의 움직임과 어울리는 이름은 '라르고'보다는 '렌토'라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어쨌든 가장 작고 느린 녀석에게 라르고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머지 두마리에게 무슨 이름을 붙이는게 좋을까 하고 고민을 했다. 이름을 붙이는데에는 젬병이라 쉽게 정할 수 없었다. 퇴근 후, 달팽이들이 식사를 하거나 투명케이지 벽면을 기어다니는 모습을 소파에 앉아 멍하니 본다. 그렇게 달멍을 하는데 가장 큰 녀석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벽면을 기어갔다.
'프레스토가 엄청 빨리 기어가!'
라는 말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입에서 튀어나왔다. 저절로 중간 크기의 녀석은 모데라토가 되었다.
달팽이의 껍질은 마치 나무의 나이테가 생기는 것 처럼 자라난다. 두꺼운 껍질 끝으로 부드러운 껍질이 새로 생겨난다. 먹이 활동이 비교적 왕성해진 탓인지 껍질의 무늬도 넓고 두꺼워졌다. 이 전의 사육자가 얼마나 먹이를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기념적인 날이다. 철봉놀이를 시작한지 3개월만에 근처 초등학교에 있는 가장 높은 철봉에서 반동 머슬업을 깔끔하게 1회 성공했다. 사실 기념적이라고 해도 후에 날짜를 기억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처음 성공한 날짜가 아니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다시 시도를 해 보았지만 힘이 빠져버려, 적당히 턱걸이와 백레버를 몇 세트인가 했다. 그리고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서 소고기를 먹기로 했다.
매일 퇴근하면서 지나는 작은 시장길의 정육점에서 간단한 저녁을 위한 고기를 사던 적도 있었다. 얼마전에는, 2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모은 쿠폰으로 소 꼬리세트를 교환하기도 했다. 지금와서는 요기를 하는 정도로만 저녁식사를 하는 터라 정육점 사장님과는 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매번 오늘은 고기를 안사가시냐는 물음에 아쉬움과 함께 살 빼는 중이라는 대답을 내 놓는다.
머슬업을 만족스럽게 성공했으니 육회 정도는 괜찮다고 자위하며 400그램 중 반은 육회로, 나머지는 뭉티기를 먹을 요량으로 그냥 받아왔다. 치커리와 함께 먹고싶었지만, 마트는 집으로 가는 갈랫길 보다 좀 더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길목의 저렴한 야채가게에 들렀다. 돗나물이 한근에 천원이었고 파프리카는 두개에 천원이었다. 이 정도면 세번 먹을 분량이다. 시장 근처에 사는 나는 비싸졌다는 물가를 좀처럼 체감하기 어렵다. 이천원이면 야채로 하루종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돗나물에는 달팽이가 들어있었다. 여느 가정집에 걸렸다면 하수구에 씻겨내려 짧을 생을 마감했을 그 녀석은 내게로 찾아왔다. 집에서 달팽이를 키우지 않았더라면 그냥 물에 흘려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달팽이의 생태를 꽤나 유심하게 관찰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반가웠다.
이전에 분양받은 세마리의 달팽이는 아프리카왕달팽이라는 외래종으로 우리나라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동물이기도 하다. 토종달팽이인 명주달팽이를 키우고 싶었지만, 어릴 적 그토록 많았던 달팽이들은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과 함께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돗나물에서 나타난 녀석은 길이가 5미리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등에 집도 없었지만, 집의 위치에 작은 돌기가 나와있는 것으로 봐서는 민달팽이도 아니다. 제대로 명주 달팽이었다.
냉장고에는 달팽이에게 줄 채소가 다 떨어져 있었다. 왕달팽이들은 양상추를 좋아하는데, 나도 조금씩 먹는 바람에 생각보다 빨리 소진되었다. 돗나물에서 달팽이가 나왔다는 건, 달팽이가 돗나물도 먹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왕달팽이 케이지에 돗나물을 넣고 물을 뿌려주자 그들은 매우 빠르게 돗나물을 갉아먹었다.
작은 명주달팽이는 냄새가 나지않는 적당한 크기의 유리 양념통에 코코피트를 깔아주고 물을 뿌리고 돗나물을 넣어주었다. 합사를 한다면 왕달팽이에게 잡아먹힐 것이 뻔했다. 이름은 '돗'이라고 지어줄거다. '돗'이라는 이름을 듣고 돗나물을 유추하는 사람은 없겠지... 보통은 돗자리 정도 일테지.
하루가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은 이 달팽이가 명주 달팽이가 아닌 두줄 달팽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름은 여전히 '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