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초등학교 이야기
삼양초등학교.
제가 81년부터 6년 동안 다녔던 학교입니다. 그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더랬죠. 당시만 해도 학생 수가 많아 1학년 때까지는 2부제 수업을 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반 아이들 모두가 복도로 나가 무릎을 꿇은 채 왁스와 마른 걸레로 바닥을 문질러야 했는데 그게 참 싫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강제 노역을 학교에서 서슴지 않고 시켰던 셈이니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아연할 따름입니다.
겨울이면 석탄을 땠는데 아침마다 당번인 아이가 양동이를 들고 교문 앞 창고로 가면 수위 아저씨가 석탄을 배급해 주었습니다. 석탄은 늘 부족해서 3교시쯤 되면 이미 불길이 잦아들었고, 한낮이어도 온기 없는 난로로 지내기에는 교실 안이 너무 추웠습니다. 일부 반지빠른 녀석들은 석탄 배급 시간에 창고 주변을 어정거리다가 수위 아저씨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틈을 타 요령껏 석탄을 훔쳐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날이면 교실 난로는 점심 무렵까지 불길이 살아 있었어요.
학교는 산비탈에 자리를 잡아 비탈 위 5~6학년 교실 건물 뒤편에는 작은 숲 같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나무가 우거져 종일 어둑했고, 회반죽을 칠해 막아 놓은 우물에선 밤마다 귀신이 울었더랬죠.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는 외딴 집 하나는 오래전 양호실로 쓰던 건물이라고 하는데 창문의 벌어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얼룩진 커튼 너머로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애 하나가 오두마니 앉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년기가 그러하겠지만 삼양초등학교를 다녔던 여섯 해는 인생의 흠 없는 시기로 마음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시험도, 반장이 되는 것도, 동경하는 여자애에게 손편지를 받는 것도, 원하면 뜻대로 다 이루어졌던 나날이었으니 하루하루가 기쁘고 경이로웠습니다. 가난했지만 당시에 우리집만큼 가난한 집은 흔하디 흔해서 가난이 아이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학교 앞 문방구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엔 학교 앞에만 해도 문방구가 예닐곱 곳이 있었고, 아침이면 준비물을 사려는 아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때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문방구는 삼양원과 대도문방구였습니다. 삼양원은 다양한 종류의 문구류와 학습 교재를 갖추어 놓아 모범생 스타일의 여자애들과 학부모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지요. 대도문방구는 조립식(프라모델)과 전자키트를 많이 갖추어 놓고 형, 누나 같은 젊은 오누이 셋이 가게를 운영했는데 조립식에 열광하는 남자애들과 좀 조숙한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대도문방구는 주인장인 형, 누나와 친해지면 매대 안쪽, 가게 주인들의 공간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가게 안쪽에서 주인장과 웃으며 시시덕거리는 5, 6학년 형, 누나들은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도문방구 파인 저는 6학년 때 비로소 매대 안쪽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그때 무슨 대단한 사람이나 된 것마냥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했더랬습니다.
비탈 밑 1~4학년 교실 건물과 위쪽 5~6학년 교실 건물을 연결해 주는 계단 길은 바위와 회반죽으로 만들어져 울퉁불퉁 고르지 못하고 몹시 가팔랐습니다. 발 딛는 면이 어린애 신발 하나 겨우 놓을 만큼 좁아서 꼭 피라미드 계단 같았어요. 남자애들 사이에선 종종 누가 더 빨리 계단 길을 뛰어 내려오는가 시합이 벌어지곤 했지요. 짧은 다리를 재게 놀리는 데 재주가 있었던 저는 그 시합에 져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꾸 발을 헛딛고 몸이 휘청거렸으며 전에 없이 가파른 계단이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계단 위에서 제대로 구르고 말았습니다. 아픈 것보다도 창피한 마음이 커서 곧바로 일어서려는데 발목에서 불이 났습니다. 친구 둘이 부축해 주어 교무실로 가니, 담임 선생님께선 '할아버지 선생님'께 가 보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할아버지 선생님'은 담임도 안 하시고 늘 외진 과학실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찾아뵈니 선생님은 따뜻한 손으로 발목을 만져주시고 손바닥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보시더니 손가락 몇 군데에 작은 반창고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곤 한번 일어나 보라고 하셨어요. 아까의 통증이 생각나 잔뜩 겁을 먹고 몸을 일으키는데 신기하게도 발목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할아버지 선생님'께서 그때 붙여 주셨던 반창고가 수지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계단 길 달리기 시합에서는 은퇴를 했습니다. 또 다칠까 봐 두려웠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그 시합을 하기에는 제가 너무 커 버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곳은 작은 운동장이었는데 지금은 공영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6학년 땐, 남자애들이 두 패로 갈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기서 야구, 축구로 대결을 했습니다. 태풍이 와서 비바람이 세찬 날에도 대결을 거르는 법이 없었어요. 당시 아이들 사이에 초인기 베스트셀러였던 "5학년 3반 청개구리들"(최승환, 현암사, 1985)은 이러한 아이들의 대결 심리를 더욱 부추겼더랬죠.
지금의 삼양초등학교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옛 자취는 저 아까시나무가 유일하지 싶습니다. 예전에는 나란히 두 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았습니다. 저 아까시나무를 보면 떠오르는 친구가 하나 있어요.
당시에는 드물게 안경을 쓰는 동호라는 친구였습니다. 동호는 집이 어려워 안경알을 늘 제일 값싼 유리알로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싸구려 유리 안경알은 어찌나 잘 깨지는지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와지끈 깨지고 말았습니다. 동호가 늘 조용하고 얌전했던 것은 어쩌면 안경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체육 시간이 항상 문제였어요. 남자애들은 보통 축구를 했는데 동호는 안경 때문에 체육 시간마다 열외 아닌 열외를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종당엔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축구 경기에 끼었지요. 운동장으로 뛰어들어 갈 때면 그 전에 꼭 실내화 주머니 안쪽에 안경을 조심스레 넣어 놓고 실내화 주머니를 골대 근처 아까시나무 밑에 두었더랬습니다. 저는 골키퍼를 할 때가 많아 동호의 그러한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단도리를 했건만 동호의 안경은 그래도 잘 깨졌습니다.
한번은 골대를 빗나간 축구공이 데굴데굴 굴러 동호의 실내화 주머니 위를 살짝 지나갔습니다. 혹시나 싶어 동호와 함께 실내화 가방을 열어 보니 안경알에 금이 가 있더군요. 그때 동호의 낙심하는 표정이란.
또 한번은 체육 시간이 끝나 동호가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러 아까시나무 밑으로 가는데 공을 너무 열심히 찬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머니를 집으려고 하다가 그만 맥없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안경알은 또 다시 산산조각 나 있었지요. 그때 동호의 표정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옆에서 지켜 보던 저는 너무 안타깝고 답답해서 동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동호야, 플라스틱 안경알은 안 깨진대. 유리알 말고 그걸로 하면 안 돼?"
그때 동호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유리알은 오천 원밖에 안 해서 이게 제일 싸다고 엄마가 이걸로만 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