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지훈 Sep 30. 2022

세바스찬의 방은 경악스러웠다.

그의 생활습관을 목격하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캐서린과 헤어지자 또 다른 중국 여자가 세바스찬의 관심을 끌었다. 헤일리였다. 시트콤 ‘모던 패밀리’ 여주인공 이름을 따왔다는 그녀. 헤일리는 멜버른 대를 다녔는데 둘은 빅토리아 주 연합 외국인 학생회에서 교류하며 만났다. 곧 연합 학생회에서 총회가 잡혔고 세바스찬은 총회 전날 헤일리와의 호텔 데이트를 잡았다. 둘이 호캉스 1박을 즐기고 다정히 총회에 나타날 생각이었다.

총회에서 만난 세바스찬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헤일리와는 따로 나타났는데 서로 본체 만체였다. 둘의 관계를 비밀로 하고 싶어서 능청을 떠나 싶었다. 회의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 나를 세바스찬이 따라왔다. 헤일리와 더 시간을 보내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는 게 뜻밖이었다. How was the date? 내가 물었다. 세바스찬은 토하는 흉내부터 냈다. 그녀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전날 밤은 이렇게 흘렀다. 둘이 침대에서 로맨틱한 시간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세바스찬은 헤일리의 겨드랑이를 보고 소스라쳤다. 털 때문이었다. 헤일리는 제모를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여성에게 제모가 강요되는 건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불평등이라고 여겼다. 세바스찬도 막힌 사람은 아니었지만 타협할 수 없는 선이란 게 있었다. 헤일리와 더 이상 밤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털도 나고 화도 난 헤일리는 집에 가겠다고 했지만 세바스찬이 그녀를 말렸다. 늦은 밤에 헤일리를 혼자 내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둘은 한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고 했다. 어색함과 불편함 속에서 얼마나 긴 밤이었을까? 기어이 헤일리를 붙잡고 재운 것은 기사도라 할지, 죄책감이라 할지.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What the fuck is this?”

“It’s my hair.”

“Do you want to take care of it?”

“No. Men don’t take care of their hair. Why should we? It’s discrimination.”

“I agree with you. But you have to shave.”

"If you can’t handle my armpit hair, you can’t handle me.”


쇼핑몰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헤일리가 떠난 자리는 미아가 채웠다. 미아는 빅토리아 대 학생회에서 일한 적이 있는 동문이었는데 비록 같이 일했던 적은 없었지만 다른 동료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된 친구였다. 세바스찬이 기획했던 (그리고 나타나지 않았던) 그 인터뷰 영상 때 나는 미아를 처음 만났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찾는 여자의 모든 조건을 충족했다.

마르고 예쁘고 동양인.

게다가 호주 태생인 미아는 맬버니안의 세련됨까지 갖춘 매력 덩어리였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그녀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대마초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미아의 집에만 가면 줄 대마를 피느라 숨을 못 쉴 정도라고 했다. 그게 안 맞아 둘은 싸우고 헤어졌다.


그리고 유미를 만났다. 둘은 ‘오케이큐피드'라는 데이팅 웹사이트에서 서로를 찾았다. 틴더보다는 조금 더 건전하고 진지한 만남을 원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유미를 만난 이후로 세바스찬은 집에 오는 날이 적어졌다. 유미의 아파트를 거의 떠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살던 집에 1년 계약이 다 끝나가자 그와 유미는 동거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나도 내 앞 길을 알아보는 세바스찬이 제안을 했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찾았는데 나보고 작은 방을 쓰는 게 어떻냐는 것이었다. 멜버른 중심가에 있는 고층 건물이었는데 퀸 빅토리아 마켓이 코앞이었다. 위치는 기막히게 좋았다. 시장이고, 슈퍼고, 식당이고 주변에 널렸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좁았다. 내 방은 옷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작아 싱글 침대 하나와 선반 하나면 꽉 찼다. 그러나 모든 가전과 가구가 딸려 있었고 위치의 이점 덕분에 우리는 집을 보자마자 계약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때부터 나와 세바스찬의 관계는 틀어졌다. 그와 살면서 나는 이미 불만이 많았다. 세바스찬은 청소와 정리를 생전 하지 않는 남자였다. 충격적이었다.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카펫은 청소기 한 번 돌린 적 없어 먼지가 자욱했고, 빨랫감은 옷장을 가득 채우고 넘쳐 바닥에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동안 사들인 옷과 더러운 옷이 뒤죽박죽이었다. 한 번 밑에 깔린 옷은 다시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한 번 입고 다시 보지 못한 옷들이 많았다. 방 한 구석엔 바나나 껍질이 썩어가고 있었다. 겨울엔 자꾸 감기에 걸린다며 온풍기를 틀어댔는데 온풍기에 쌓인 먼지를 한 번이라도 들여다봤으면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을 것이다. 샤워 타월은 왜 새하얀 걸 샀는지 샛노랗게 변해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걸 1년 내 썼다. 면도를 하면 세면대는 막혔고, 손톱도 꼭 세면대에서 깎았다. 행주로 주방을 대충 닦고 나면 음식 찌꺼기와 국물에 젖은 걸 그대로 놔둬 썩히곤 했다. 그동안 그의 방에 들였던 여자들을 생각했다. 침대보를 바꾸고 방향제를 놓아주던 비가 세바스찬을 어떻게 견뎠을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자들이 하룻밤만 보내고 헤어지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바스찬에겐 잔소리를 하기가 싫었다. 그는 내게 은인과 같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유미를 만나고부터는 집에 거의 들어오질 않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동거는 계속됐던 것이다. 세바스찬의 게으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곧 유미도 만만찮은 상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좁은 화장실은 그녀의 화장품과 생리대와 머리카락으로 엉망이 됐다. 그들은 여행을 갔다 오면 짐가방을 거실에 그대로 놔두고 치우질 않았다. 건조기에 말린 옷은 비우지 않고 하나씩 꺼내 입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내가 건조기를 쓰려고 그들의 옷을 꺼내 침실로 옮겼더니 말없이 옷에 손대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다.

아주 드물게 집안일을 할 때면 그들은 치사하기가 짝이 없었다. 드물게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이 있으면 그들은 절대 새 봉투를 끼워놓지 않았고, 식기세척기를 돌렸으면 절대 비우지 않았다.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않고 내가 조금이라도 수고를 할 부분을 꼭 남겨뒀다. 그렇게 일했단 티를 내고 싶어 했다. 한 번은 나도 끝까지 가보자 싶은 마음이 들어 쓰레기봉투를 끼우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쓰레기통 뚜껑 위와 주변으로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도 넘어갈 수 있는, 혹은 그게 보이지조차 않는 그들의 능력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우리가 살던 집 앞에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이전 16화 세바스찬이 만난 여자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