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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Oct 02. 2022

룸메이트가 오래되니 원수가 됐다.

결국 청소를 가지고 크게 한 판을 했다.

그들은 언제나 피곤과 스트레스에 짓눌려 사는 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로레알에서 마케팅을 하고 있었고 유미는 어그 매장 매니저였는데 집에 오면 둘의 신경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사소한 다툼도 많았다. 현관에 놓을 신발 선반을 조립하면서도 그들은 싸웠다. 유미가 조립하는 모양이 시원치 않자 세바스찬은 “What are you doing?”이라며 짜증을 냈다. 세바스찬은 “What are you doing?” 소리를 잘했고 그때마다 유미의 성질을 건드렸다. 유미는 세바스찬을 흉내 내며 “What are you doing? What are you doing? You always say that!”이라고 화를 냈다.

그러다 그들이 심하게 싸웠던 밤이 있었다. 좁고 방음이 되지 않는 집이라 모든 소리가 다 들렸다. 유미가 세바스찬의 직장 동료를 질투한 것이었다. 인스타그램에 댓글이라도 단 것인지 아니면 문자라도 주고받은 것인지 유미가 이를 발견했다. 세바스찬은 그저 동료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세바스찬을 믿는 쪽이었다. 세바스찬만큼 충절에 목을 거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바스찬의 직장동료는 아주 예쁘장한 동양인이었다. 유미의 심정도 이해가 됐다. 세바스찬에게 타입이 있다는 걸 유미도 모를 리가 없었다.

“You don’t care about me anymore!” 유미가 소리쳤다.

“I don’t care about you? I do things for you all the time. I always pick you up after work. I don’t have to do that but I do!”

“I’m leaving. I’m going to my friend’s place.”

“Then go! Leave!” 세바스찬이 소리쳤다.

유미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You pushed me! You just fucking pushed me!”

싸움은 몇 시간이고 계속됐다.


그걸로 둘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둘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다시 다정하게 놀러 다니고, 집에 오면 또 싸웠다. 싸울 때면 이걸로 마지막이지 싶으면서도 조금 지나면 더없이 끈끈해 보였다.

세바스찬과 유미는 주말만 되면 옷을 차려입고 카페를 다니고 브런치를 먹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공동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어떤 옷을 입고, 어딜 갔고, 무엇을 먹었는지 기록하며 인플루언서의 흉내를 냈다. 가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연출된 사진이 민망할 때도 있었다. 시상식에 가는 듯한 복장과 육중한 선글라스 차림으로 카페에 앉아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러움과 수수한 멋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됐다. 프로필에는 컬래버레이션 문의는 이메일로 해달라는 문구도 빼놓지 않았다. 내가 아는 그들은 집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밖으로는 도시의 우아한 파워 커플 이미지 만들기에 열중이었다.

그들도 내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나를 자기들 집에 얹혀사는 친구쯤으로 대했다. 방세는 공평하게 내고 있으니 내가 기죽어야 할 일은 없었지만 세력은 2대 1이었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반면 내가 짐을 치우라거나 세탁물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하면 짜증을 냈다. 골은 점점 깊어져서 말도 섞지 않을 정도가 됐다. 마주치면 인사만 할 뿐이었다. 어쩌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면 오랜만에 만난 사인 듯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며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과 겹치지 않으려고 애써 내 일정을 조절했다.

얼어붙은 우리 관계를 더욱 돌이킬 수 없게 만든 것은 결국 청소를 두고 한 싸움이었다. 세바스찬이 아파트 대청소를 제안했다. 그와 유미는 화장실을, 나는 주방을 맡기로 했다. 청소를 마치고 사무실에 나온 나는 세바스찬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주방이 아직 더러우니 다시 하라는 말이었다. 사진까지 찍어서 지적하는 게 너무 치졸해서 열이 올랐다. 그동안 청소를 해온 건 나 하나뿐이었으니 그 지경으로 더러워진 건 너희들 책임이라고 내가 답했다. 그렇게 문자로 싸웠다. 그 꼴이 한심해서 결국 내가 전화를 걸었다. 세바스찬은 “You had one job.”이라고 나를 약 올리는 말을 했다. 세바스찬의 또 다른 말버릇이었다. 일 하나 맡겼는데 그것도 못하냐고.

전화를 끊은 뒤 세바스찬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그동안 오해가 많이 쌓인 것 같으니 대화로 풀자고 했다. 오랜만에 저녁이라도 먹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같이 저녁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본척만척 사이였다. 그렇게 1년을 살았다. 계약이 만료될 때쯤 세바스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세바스찬과 유미는 집을 재계약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둘만 있길 원했다. 나도 나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나가 달라는 완곡한 부탁을 받으니 정은 더 떨어졌다.

세바스찬과 유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세바스찬의 생일이었다. 세바스찬은 모두에게 하얀 옷을 입고 와달라고 했다. 그게 사진 콘셉트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아무 옷이나 입었다. 열댓 명의 사람들 가운데 세바스찬이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지인들이었다. 학생회와 외국인 학생회에서 그렇게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 놓고도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은 건 세바스찬의 인간관계를 잘 보여줬다. 하나 같이 세바스찬에게서 정이 떨어졌다며 연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친해질수록 막 대하거나 득이 될 거 같지 않으면 소홀히 하는 게 세바스찬의 태도였다.

몇 년 후 세바스찬과 유미는 결혼을 했다. 나는 초대도 연락도 받지 못했지만 소셜미디어만 들어가면 알지 못할 소식이 없었다.


하교 축제에서


세바스찬은 나의 형제, 멘토 같은 사람이었다. 끝에는 서로에게 질려서 등을 돌렸지만 그와의 만남 덕분에 나의 호주 인생이 역전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세바스찬에게서 나는 좀 더 용기 있게 사는 법을 배웠다. 불편하고 쑥스럽다고 할 때 그는 자꾸 학교 사람들과의 모임에 나를 불렀다.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서투른 영어도 능숙해지는 것 같을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그에게서 인생의 지혜도 배웠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인이란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외모는 그 다음이었다. 관계가 오래되면 섹스는 어쩔 수 없이 지겨워진다고 했다. 모든 여자 친구들과 그랬다고 했다. 섹스가 일상이 되고 별 볼 일 없어지면 나머지의 무한한 보통의 시간은 성격으로 채워진다고 했다. 그 말이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았다.

그와 드가니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와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빅토리아 대에 전입하고 영상 제작자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호주 이야기는 파이 페이스에서 끝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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