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만 좋으면 나는 바다를 갔다.
등록금 때문에 걱정하던 날들은 호주에서 가장 힘든 시간들이었다. 즐겁고 여유로운 사람들 속에서 나만 비참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은 있었다. 여전히 내 삶이 놀랍기만 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쇼핑몰만큼이나 내가 다니기 좋아하는 곳은 바다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바다를 찾았다. 멜버른에 살며 바다를 가지 않는 것은 큰 손해를 보는 일이라 여겨졌다. 춥고 비 내리는 멜버른의 겨울이 지나면 나는 매일 날씨 예보를 확인하며 따뜻해지는 날만 기다렸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는 윌리암스타운 해변 Williamstown Beach이었다.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거나 수업이 끝나면 나는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 책, 이어폰, 물병, 타월을 챙겨 버스를 탔다. 수영복 반바지를 입고 해변에 가서 웃옷만 벗으면 바로 물에 뛰어들 수 있었다. 바닷물은 언제나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물에 발을 담그면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차라리 머리부터 다이빙을 하면 고통은 잠깐이었다. 차가운 물은 금방 익숙해졌고 상쾌하기까지 했다. 한동안 첨벙거리다 모래밭에 올라와 해를 쬐고 누워있으면 이것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일광욕을 하며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게 재미였지만 친구와 동행을 하는 것도 좋았다. 세바스찬과도 가끔 쇼핑몰을 뒤로하고 바다에 갔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옷을 벗기를 거부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직 자기 신체 이미지에 대한 불안이 큰 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어릴 때 심한 비만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잔혀 흔적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남은 것 같았다. 몸 드러내기가 어려우면 바다는 고통스러운 곳이 될 수 있었다. 그 두려움은 나도 알고 있었다. 사춘기 때 내 몸의 부끄러움을 처음 깨닫고는 남들 앞에서 내 살 드러내기는 악몽이 되었다. 그걸 극복한 것은 인도 배낭여행 때였다. 찌는 더위 속에서도 나는 반바지조차 쑥스러워 입지 않았다. 하지만 남부 인도의 아름다운 해안을 여행하며 온몸으로 즐기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큰 용기를 내어 웃통을 벗었다. 처음엔 완전히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상관하는 이 없었고 곧 자연스러운 게 되었다. 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이상한 집념임을 깨달았다. 목욕탕에 가면 홀딱 벗는 게 당연하면서 야외 수영장이나 바다에 가면 조금이라도 더 감싸느라 전전긍긍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소피와 친구가 되고 나서는 소피의 차를 타고 같이 윌리암스타운을 놀러 다녔다. 차 안에서는 언제나 게이 애창곡들을 틀었다. 윌리암스 해변에는 파도가 전혀 치지 않았다. 고요한 물속에서 게으르게 몸을 움직이며 우리는 속 깊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대부분 LGBT 이슈와 연애에 관한 것들이었다. 레즈비언으로 막 데뷔한 소피는 활발한 데이트를 시작했고 얘기할 거리도 많았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의 얘길 들으면 내 마음도 설렜다. 내게 커밍아웃 한 이후로 소피는 부모님에게도 정체성을 알렸다고 했다. 큰 드라마는 없었다고 했다.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그런 용기가 보기 좋았다. 나는 아직도 부모님께 말하지 않은 채였다.
윌리암스타운이 평온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의 휴양지라면 세인트 킬다 해변 St. Kilda Beach 은 각국의 젊은이들이 북적이는 파티 동네였다. 음악을 틀어놓고 공이나 프리스비를 주고받는 열혈 20대들이 해변을 점령했다. 바닷가 근처로는 동심 가득한 놀이공원 루나 파크 Luna Park가 있었고 그 옆 애클랜드 가 Acland Street엔 케이크 가게와 피시 앤 칩스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방문객의 감성을 있는 대로 흔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아이스크림 커피를 먹으며 하염없이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맥도널드에서 1불짜리 콜라 슬러시를 사들고 산책을 하는 시간은 완벽한 휴일이었다. 선착장 끝까지 가면 돌무더기 사이에 숨은 페어리 펭귄을 엿볼 수도 있었다.
나를 따라 바다에 오는 친구들은 새삼 놀라고는 했다. 이 좋은 걸 왜 안 하고 있었을까 하며 내가 휴양지에라도 데려온 듯한 반응을 보였다. 너무 가까이 있어 당연한 게 돼버린 나머지 즐기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나중에 시드니에 살기 시작했을 땐 시드니 무엇이 좋냐는 토박이들의 말에 바닷가라고 답하면 사람들은 "Oh, the beaches. We have them"이라며 이제 막 떠올랐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9월의 멜버른은 아직 겨울이었다. 그런데 워낙 날씨가 변화무쌍해서 하룻밤 새 여름 날씨가 찾아오기도 했다. 유난히 더웠던 날이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윌리암스타운에 가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집을 향하는데 키아누라는 친구와 잠깐 말을 섞게 됐다. 수업에서 짝이 되어 같이 스토리보드를 그리게 된 친구였다. 스토리보드는 종이에 여러 칸을 나눠 장면을 간결하게 그리는 게 정석이었는데 키아누는 한 장 전체를 꽉 채우는 캐리커쳐들을 그렸다. 우리 스토리보드를 발표했을 때 강사는 형식이 틀렸다고 지적했는데 키아누는 강사가 이해하지 못한다며 자기 그림에 퍽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키아누가 바다에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윌리암스타운 가는 열차 안에서 그는 조잘조잘 말이 많았다. 뜬금없는 소리를 잘하는 친구였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대화 주제는 어디로 튈지 몰랐다. 어쩔 땐 대화라기보다 독백에 가깝기도 했다. (내가 너무 조용해서 나와 대화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독백이 되는 탓도 있는 것 같았다. )
바닷가에 우리는 타월을 깔고 앉았다. 키아누는 고향이 바이런 베이 Byron Bay라고 했다. 동부의 해안가를 쭉 올라가면 중간쯤에 나오는 동네였는데 한 때는 히피들의 성지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관광객과 부자들이 몰리며 호주에서 집값이 가장 비싸진 바닷가 동네였다. 그의 느른한 말투, 판초 상의와 펑퍼짐한 바지, 정신세계와 비주류 문화적 성향을 보면 히피의 정서가 뚝뚝 묻어났다. “People don’t make eye contacts anymore.” 수업 시간에 키아누가 말한 적이 있었다. “Too busy looking down at their phones. Like zombies.”
첨단기술과 유행을 거부하던 키아누는 핸드폰도 구식 폴더폰이었다. 튼튼하고 오래가는 전화기 하나면 더 뭐가 필요하냐는 태도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소셜미디어에는 열심이었다. 컴퓨터를 쓰는 실습수업에만 들어가면 페이스북에 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못다 한 포스팅을 작성하느라 바빠지곤 했다. 그는 "Om shanti shanti namaste"와 같은 문구나 우리는 모두 대자연속에 사는 형제와 자매들이라는 내용들을 올렸다.
윌리암스타운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그는 갑자기 종이와 연필을 꺼내 시를 쓰는 것이었다. 원숭이와 용이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원숭이는 저 자신을, 용은 나를 상징했다. 다른 나라 출신에 인종도 다른 우리의 만남을 노래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땅에서 물로, 더위에서 정화로, 영혼을 씻으러 간다'와 같은 낭만적이고 정신적인 문장들이었다. 여백에는 작은 그림까지 그렸다.
학교를 졸업하고 우연히 키아누를 만난 일이 있었다. 달리기를 하러 나간 길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멜버른에서 버스킹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듯한 실력이 있어야 했다. 시에 신청서를 내야 했고 어느 경우엔 오디션까지 봐야 했다. 키아누의 기타 연주는 대단했다. 학교를 다닐 때 그가 집에서 즉흥으로 만들었다는 음악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는 학교를 마친 후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는 페이스북에 그의 여정과 일상을 꾸준히 올려왔다. 다음 주엔 뉴질랜드와 멕시코에 간다고 했다.
공연하는 키아누를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어 금방 작별을 했다. 헤어질 땐 “Have fun with the busking!”이라고 했는데 어딘가 깔보는 소리처럼 들려 돌아서자마자 후회했다.
뉴질랜드와 멕시코를 간다고 했을 때 나는 부러운 인생이라며 짐짓 말은 했지만 사실 부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게도 여행이 세상에서 제일 두근대고 신나던 시기가 있었다. 시간만 나면 나는 있는 돈 없는 돈 털어가며 비행기를 타곤 했다. 일상에서 달아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딜 가지 않는 삶이 더 좋았다. 멜버른에서 뿌리내리기에 나는 그만큼 집중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키아누는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남겼다. 페이스북이 자기 내면의 평화를 망친다며 소셜미디어를 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걸 기어코 페이스북에 들어가 말해야 하는 역설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