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사의 취향은 시베리아와 같았다.
졸업은 기쁘면서도 걱정되는 일이었다. 학비를 두 번 다시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게 큰 해방이었지만 한편으론 학생 비자가 끝나고 2년짜리 졸업 비자로 바뀌기 때문에 초조하기도 했다. 시간제한이 생긴 것이었다. 그 안에 호주 영주권자가 될 길을 찾아야 했다.
졸업 비자는 유학원 같은 곳에 맡기는 게 보통이지만 혼자서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800에서 1000불 정도 되는 대행료를 아낄 수 있었다. 정부와 비자가 관련된 일이라면 덜컥 겁을 먹고 전문가를 찾기가 쉽지만 차근차근해나가면 못할 것도 없었다. 매년 7월부터 시작되는 세금 정산도 많은 사람들이 회계사에 맡길 때 나는 내 손으로 했다. 인생공부라는 마음으로 임하면 됐다. 처음엔 어려운 용어들과 시스템에 압도가 되지만 결국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대학교육도 받았고 혼자 외국에 사는 정도의 생활력이 있으니 이 정도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또 영상이란 걸 배우며 훈련이 된 자세기도 했다. 애프터 이펙트니 포토샵이니 하는 것들을 처음 쓸 땐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어렵고 막막하지만 하나씩 기능을 쓰다 보면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 됐다. 카메라를 만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맞닥뜨릴 때 생기는 거부감을 접고 자꾸 배우려고 노력을 해야 사람은 늙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걸 귀찮아할 때 사람은 그렇게 꼰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비자 신청이나 세금 환급을 하며 정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으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거나 라이브 채팅을 해서라도 도움을 청했다. 정부 웹사이트에 그런 서비스는 의외로 잘 돼있었다. 라이브 채팅에서 진짜 사람과 연결되면 작은 성취감까지 느꼈다. 내가 골머리를 썩고 있는 부분을 얘기하면 상담원은 성심껏 대답을 해줬다.
졸업 비자가 나오자 세상은 달라졌다. 피눈물을 짜가며 바쳐야 했던 등록금이란 더 이상 없었다. 2주에 40시간이었던 근로 제한도 사라졌다.
학교를 졸업하며 학생회는 그만둬야 했지만 나는 다른 부서에서 일을 찾았다. 블렌디드 러닝 Blended Learning이란 곳이었는데 학교의 온라인 교실을 담당하는 팀이었다. 학생들이 과제 제출이나 자료 이용 등을 하게 만들어진 플랫폼으로 그 공간을 관리하는 게 우리 팀의 역할이었다. 빅토리아 대가 온라인 시스템에 대대적인 예산과 인력을 투자하던 시기였다. 모든 수업에 온라인 교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길 원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강사들이 플랫폼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했다. 우리 팀의 많은 직원들이 강사들과 함께 온라인 교실을 만들고 관리하는 일에 투여됐다. 젊고 컴퓨터가 익숙한 강사들은 직관적으로 이를 해내는 반면 나이 많은 사람들에겐 악몽 같은 일이기도 했다. 가르치기만 잘하면 됐지 이런 기술까지 배워야 하느냐며 불만의 소리도 컸다. 그런데 시대는 바뀌었고 인터넷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 없게 돼버린 지경이니 변화는 어쩔 수가 없었다. 과제를 종이에 출력해서 강사의 사서함에 제출하는 제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인터넷 페이지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본적인 틀은 우리가 제공해 줬지만 그걸 자기 수업에 맞게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 부서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수시로 전화가 울렸다. 모두 도움을 청하는 강사들이었다. 학교의 새 교육방침을 따르기 위해 컴퓨터와 씨름을 하는 강사들의 절박하게 우리를 찾았다. 팀장 마이크조차 그 정도 직급에도 불구하고 강사들 상대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자면 얼마나 애를 먹는지 절절히 느껴졌다. 아주 간단한 지시도 못 따라오는 강사들이 있어서 마이크는 끈질기게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로그인조차 어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이크는 두 눈알을 짓눌러가며 인고의 시간들을 견뎌냈다. 그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인터넷 쇼핑이나 이메일을 도와주며 속이 썩어 들어가던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거기에 공인인증서 발급까지 해야 한다면?
직원들은 이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다행히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업무였다. 나는 영상 담당이었다. 우리는 모든 수업에 수업 소개 영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는 이고르라는 직원이 담당하고 있었고 내가 그 밑에 파트타이머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이고르는 성격이 좋아 같이 일하기 편했다. 다만 대체 어떻게 채용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한 사람이었다. ‘멀티미디어 디자이너'라는 직책의 이고르는 디자이너라기 보단 동네 인쇄소 아저씨에 가까웠다. 기본적인 디자인 기술은 있다. 프로그램을 열어서 뭔가를 꾸미고 추출해서 결과물을 만들 줄은 안다. 그러나 인쇄소 아저씨가 ‘마케팅’, ‘홍보'를 한다고 간판에 아무리 써놓는다고 해서 아무도 SNS 홍보를 맡기지 않듯이 이고르에게 디자인과 영상제작을 맡기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동네 미장원에서 신부화장을 받지 않고, 무슨 '부띠끄'에서 정장을 맞추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미적 감각은 대학교라는 기관에 발 디딜 수준이 아니었다. 이고르는 단언 어르신의 감성이었다. 복지관에서 노년들을 대상으로 새해인사 카드 만드는 수업을 맡으면 어울릴 사람이 이고르였다.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실수가 될 수 있지만 디자인은 곧 시각의 예술이 아닌가? 자기 차림새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심미적인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고르는 매일 색 바랜 야구 모자, 헐렁한 폴로셔츠, 펑퍼짐한 청바지, 한 치수 큰 러닝화를 신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죽었다 깨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 취향이었다. 의류 디자이너들이 나와서 경쟁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테이스트 레벨이 남다르다는 칭찬을 듣는 사람은 여지없이 승승장구했고, 테이스트 레벨이 의심된다는 사람은 아무리 발악을 해도 꼴찌였다.
호주에서 겪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취향의 수준은 그 사람이 자란 나라의 문화 수준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다. 개발도상국이라고 여겨지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뭘 만들어도 어딘가 촌티가 났다. 러시아 남자 일리야와 이고르의 창작물이 그랬다. 가히 취향의 멸망이었다. 심미의 시베리아.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는 눈이 얼마나 뛰어난지 새삼 깨닫곤 했다. 인터넷에서 한국의 콘텐츠를 접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콘텐츠와 캐릭터 산업의 왕중왕이라고 하는 일본과도 견줄만한 경지인 것도 같았고 어쩔 땐 이미 추월한 것 같기도 했다. 죽자 사자 일하고 경쟁해야 하는 두 국가의 분위기 덕도 있지 않을까 했다. 필사적인 데에서 뛰어난 콘텐츠가 나오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호주도 취향만큼은 따라오질 못하는 게였다.
이고르가 작업하는 효율을 봐도 눈물이 날 정도였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와 프리미어를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은 썩 인상적이었지만 웹페이지에 넣을 간단한 모양이나 문장 하나 만들자고 몇 시간을 딸깍 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질 때가 있었다.
이고르의 디자인을 믿지 못해선지, 생각보다 디자인 일이 많지 않아선지 그는 원래의 직책에도 불구하고 영상 일을 더 많이 하게 됐다. 그래서 이고르는 영상 공부를 시작했고 근무시간을 유튜브나 온라인 강의를 보며 보냈다. 이고르가 그동안 혼자서 만들어온 영상들을 보게 됐다. 음향은 찢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오디오 파일을 보면 그래프가 하나같이 평평했다. 오디오는 들쭉날쭉 굴곡이 많은 게 정상인데 그는 일정한 모양이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소리를 있는 대로 키워 녹음한 것이었다. 어느 영상 마지막 부분에선 강사의 얼굴로 서서히 줌인을 한 편집도 보였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진지한 대사를 할 때 쓰이는 촬영법을 흉내 낸 것이었다. 그걸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이고르 옆에서 나는 속으로 경악을 하고 있었다.
수업 소개 영상 만드는 게 우리의 주 업무였지만 때때로 강사들의 제안을 받아 특별한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나름 아이디어 내길 좋아하는 강사들이 구상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디어가 실현 가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의도는 듣되 그걸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할지, 애초에 영상으로 만들어질 가치가 있는 것인지 결정하는 게 프로듀서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고르는 강사들이 원하는 건 다 해 주자는 주의였다. 그들이 들이대는 아이디어들을 곧이곧대로 영상으로 만들었다. 좋게 보면 열려있다고 할 수 있었다. 달리 보면 주도권을 잡지 않음으로써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그럼 편하기 때문이다. 강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고 성과에 대한 걱정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망하면 ‘나는 강사가 하자는 대로 했다’고 하면 된다. 수업에서 팀 과제를 하면 일 하나 거들지 않다가 점수가 잘 안 나오면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들의 심리였다. 강사들이 들고 오는 아이디어는 대부분 역할극, 상황극 같은 것이었다. 쉽게 말해 지하철 공익광고의 유형이었다. 강사들은 실험실 안전수칙, 모의 비즈니스 미팅, 면접 보는 법 등의 주제를 가지고 대본을 만들어왔다. 연기는 조교나 학생들을 시키면 된다고 했다. 본인의 출연을 제안하면 자기는 절대 못한다고 정색을 했다. 그렇게 싫고 어려운 걸 알면서 다른 사람들은 기꺼이 해 주리라는 착각이었다. 좌충우돌하여 일정을 잡고 인력을 모아 촬영을 시작하면 카메라 앞에서 눈뜨고 볼 수 없는 연기를 펼쳤다. 억지로 찍어서 완성된 영상은 아무 데도 쓰이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묻혀 사라졌다.
이 짓을 몇 번 반복하고 내가 이고르에게 말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영상의 형식과 질을 관리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는 남들이 원하는 건 군말 없이 따르는 게 가장 좋은 처세술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대학이란 기관에서 일하며 그렇게 연명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나서지 않고 주어진 일만 조용히 하며 자리를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대학교 곳곳에서 일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런 무사안일 자세가 답답할 때가 많았다. 학생들에게는 혁신과 기업가정신을 닦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예외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처음 영상 일을 시작했을 땐 쓸모없는 것들을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처음과 실수는 있는 법이었다. 전에 만들었던 영상들을 보면 창피해서 도망가고 싶어질 정도였다. 누구를 위해, 왜 만드는지를 잊었기 때문이었다. 이고르도, 나도, 강사들도 결국엔 학생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대학이란 거대한 세계는 학생들을 위해 존재했다. 이걸 보아 넘기기가 쉬웠다. 직원들은 학생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저들끼리의 회의와 이메일만 있었다. 그래서 서로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서로를 만족시키는 일을 했다. 영상이 완성이 되면 우리는 동료 직원들과 담당 강사에게 보여줬고 그럼 수고했다, 최고다, 칭찬을 들었다. 영상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는 얘기가 없었다. 만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애초에 명확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일 무덤에 차곡차곡 쌓인 영상은 시간이 지나며 잊혔다.
보지 않는 창작물을 만드는 실수는 한국에서 연극 영화를 전공할 때 이미 깨달았던 교훈이었다. 연극이나 영화를 만들 때면 우린 사명감과 제멋에 취해 작업에 열중했다. 그렇게 한 학기 꼬박 밤새워 만든 작품은 보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만 흥분해서 서로의 천재성을 칭송했다.
이고르가 잘리지 않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서의 자유로운 분위기 덕이기도 했다. 서로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문화였다. 그래서 좋았던 것은 할 일이 없어도 꼬박꼬박 사무실에 나가 시간을 채울 수 있었던 점이다. 새로 산 장비를 만지작거리느라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 새로운 편집 기술이나 프로그램을 시도한다며 바쁜 척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서에 돈이 아주 많다고 느껴졌다. 대학마다 온라인 플랫폼 경쟁이 치열할 때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0년도 전에 일상이 된 기술을 그제야 실용화하는 걸 보면 정보 기술만큼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앞섰는지, 혹은 호주가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무실엔 하루가 멀다 하고 영상 장비가 계속 추가가 됐다. 방송국에서나 쓰는 텔레프롬프터까지 구입했다. 우린 새 장비가 생길 때마다 쓰는 법을 배우느라 열중하는 티를 낼 수 있었다.
또 다른 파트타임 영상 제작자까지 고용이 됐다. 어느 날 사무실을 나와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장비를 만지는 게 보였다. 잠깐 촬영을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게 다였다. 어디서, 왜 도와주러 왔다는 것인지는 말이 없었다. 다만 채널 7에서 뉴스 촬영을 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채널 7은 호주의 5대 방송국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곳이었다. 스튜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우리와 몇 번 같이 작업을 하더니 곧 정기적으로 사무실에 나왔다. 윗사람들이 알아서 결정하는 일이겠거니 했다.
스튜와 내가 수업 소개 영상을 찍기 위해 촬영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표본 영상을 만들어 강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영상 속 강사역은 사무실 직원 수니티에게 부탁했다. 모든 설치를 마치고 녹화를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스튜가 수니티에게 다가가 머리를 만지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Jee might be thinking this is inappropriate.” 스튜가 웃으며 말했다. “Don’t worry, we’re married.”
그제야 이해가 됐다. 스튜는 그렇게 해서 고용이 된 것이었다. 수니티의 연줄이었다. 그래서 ‘잠깐 도와주러 왔다'는 식의 말로 흐린 것이었다. 새 직원을 고용하려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는 게 맞았다. 나도 그렇게 들어왔다. 그러나 귀찮고 오래 걸리는 채용과정을 생략하고 경력으로 검증된 촬영기사를 데려온 것은 서로 좋은 일이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었다.
스튜의 노련함 덕분에 나와 이고르는 배우는 게 많았다. 채널 7에서 뉴스를 하다 온 사람이라 거들먹거릴 줄 알았지만 스튜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가장 상급자는 이고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가장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튜가 자연스레 리더가 됐다. 그래서 우리 셋의 관계가 애매했다. 스튜가 팀을 이끌긴 했어도 나와 직급이 같은 파트타이머였다. 이고르는 명분이 정직원이었지만 오히려 우리를 따랐다. 프로덕션에 우두머리가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민주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영화에는 감독이 있고 연극에는 연출이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위에서 결정하는 사람 없인 서로가 맞다며 저 하고 싶은 걸 하기 때문이었다. 스튜의 능숙함에는 견줄 사람이 없다는 건 인정해도 나는 그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지없는 뉴스 보도 같아 보여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조명을 지나치게 밝게 세우고 강사를 정중앙으로 잡아 프롬프터를 읽히는 형식이었다. 한국에서 들었던 온라인 강의들의 스타일이 꼭 그랬다. 파스텔과 베이지 톤 정장을 입은 여자 앵커가 나와 큐카드를 든 손을 배꼽 앞에 포개고 서서 로봇처럼 대본을 읽는 (프롬프터 읽히면서 큐카드는 왜?) 고리타분함에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한숨이 나올 그런 영상이었다. 재밌고 화려한 걸 만들자는 게 아녔다. 수업은 수업이었다. 다만 세대를 생각해서 가볍고 보기 편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 측은 ‘가볍다'는 말만 들어도 기겁할 정도로 모든 걸 심각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 나는 또 똑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이 영상들은 누굴 위해 만드는 것인가? 우리는 학생들과 철저히 단절돼 있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을 위해 자꾸 뭘 하겠다는 모습이 나는 안타까웠다. 우리 팀에서 학생에 가까운 사람은 나 하나였고 내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들의 자의식과 욕구가 앞선 영상들만 자꾸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