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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Oct 19. 2022

인턴십 헬

나와 정직원의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달리기도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멜버른은 어딜 가도 달릴 곳이 많았다. 숨이 넘어가고 다리가 부서질 정도로 뛰고 있으면 묘한 쾌감이 왔다. 흔히 말하는 러너스 하이란 건진 잘 모르겠다. 달리기의 고통이 심해지면 그걸 상쇄하기 위해 정신을 고양시키는 물질이 분비돼 황홀한 기분이 든다고 하는데 나에게 고통은 고통일 뿐이었다. 다만 아름다운 풍경, 같이 달리는 사람들과의 소속감, 완주했을 때의 성취감이 좋았다. 그 행복이 자꾸 생각나 힘들 걸 알면서도 다시 찾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리기 코스는 로열 보태니컬 가든 Royal Botanical Gardens이었다.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에서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넓은 공원이었다. 그 주변을 둘러싼 산책로를 더 탠 The Tan이라고 불렀는데 주말엔 달리기를 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명소였다. 탠을 달리다 보면 경사가 나오는 구간이 있었다. 거길 넘는 것이 고비였다. 오르막길을 달리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걷거나 쉬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나는 매번 그 속도 그대로 달려서 고개를 넘었다. 제발 멈추라고 아우성인 몸을 조금 더, 조금 더 끌고 가다 보면 끝은 나왔다. 그렇게 힘들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열심히 할걸, 하는 후회가 항상 들었다.


더 텐에서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

학교 마지막 학기에는 현장실습이 있었다. 졸업 요건 중 하나라 중요한 학점이었지만 어디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학교에서 연결해 주리라 은근한 기대만 하고 있었다. 산업계와 얼마나 연결이 잘 돼있는지 자랑하는 게 빅토리아 대학교의 특기였기 때문이었다. 마케팅을 보면 온통 그런 내용뿐이었다. 다른 대학들도 다 그랬다. 졸업을 하자마자 공백 없이 일자리를 찾게 해 준다는 홍보가 대학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나 마케팅이란 곧 부풀리기의 기술이었다. 졸업생 한 명이 어느 유명회사에 들어가면 곧 산학연계라고 대서특필하길 좋아했다. 로레알에 들어간 세바스찬도 그렇게 학교 홍보 책자에 등장했다.

우리 과 학생들은 모두 영상이나 디자인 업체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학교가 놓아주는 다리는 전혀 없었다. 겨우 이력서나 커버레터 쓰는 법 알려주는 게 다였다. 학생 신분으로 인턴십을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녔다. 나를 증명할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실습수업 첫 몇 주는 교실에서 이루어졌다. 나머지는 실제로 현장을 나가야 했다. 수업이라기도 민망한 그 시간은 강사가 학생들을 재촉하는 자리에 불과했다. 학과장 마크는 다들 인턴십 자리는 잡았냐고 묻기만 했다. 그럼 몇몇이 손을 들었다. 친구가 하는 업체에 들어간다는 사람도 있었고, 할아버지가 극장을 운영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만 답했다. 인터넷으로 영상 업체들을 검색해서 이력서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럼 마크는 이렇게 말했다. "Okay, you need to find your internship as soon as possible."

당연한 소리를 그는 마치 조언처럼 건네줬다. 다른 수업에서도 강사들은 종종 하나마나한 소리를 진지한 상담 해주듯 해줬다. 뮤직비디오 만드는 수업에서 내가 아직 배우를 못 구했다고 하니 강사는 “You need to find your actors as soon as possible."이라고 했다.

한 수업당 거의 2,500불에 가까운 돈을 내며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나는 인터넷에 ‘video production company’를 쳐서 보이는 곳마다 이력서를 보냈다. 그리고 수업시간이 돌아오면 마크는 같은 소리만 했다..

대부분은 답장이 없었다. 몇몇에서는 지금은 사람이 필요 없다고 정중한 거절이나마 보냈다. 그러다 딱 한 군데에서만 연락을 받았다. 사장 데이브는 내게 영상 지원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친구에게 촬영을 부탁해 자기소개 영상을 찍었다. 카메라 앞에 서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슨 능력이 있는지 팔아야 했다. 영상을 편집해서 보냈더니 면접을 보자고 했다. 데이브의 사무실은 리치먼드에 있었다. 데이브와 간단히 얘기를 마치고 출근 날짜를 잡았다.

인턴십은 쉬웠다.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데이브는 기업이나 사업들의 홍보 영상을 주로 만들었다. 사무실엔 정직원 두 명이 하루 종일 편집을 했다. 촬영하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영 전달만 하러 가끔 사무실에 들렀다.  내게 실무를 맡긴 적은 거의 없었다. 아주 간단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편집만 가끔 시켰다. 그래서 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데이브는 자기 회사 홍보영상을 만들어 주는 게 어떻냐고 했다. 그래서 데이브와의 인터뷰를 찍고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찍었다. 데이브가 그동안 만들었던 영상들의 하이라이트도 추렸다. 드라이브에 저장된 엄청난 용량의 영상들을 뒤져가며 좋은 부분들을 골랐다. 그게 오래 걸려서 시간 보내기에 좋았다.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에 데이브도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때는 크리스마스 무렵이었고 회사 전 직원이 모여 점심 회식을 했다. 사무실에서는 같은 얼굴 서너 명만 보아왔는데 회식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열명도 넘었다. 모두 일이 있을 때만 사무실에 불려 오는 프리랜서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다들 나와 비슷하거나 어린 나이였다. 모두 백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영상 산업은 백인들의 세상이었다.

인턴십 100시간을 채우고 회사를 떠나는 날 나는 진 한 병을 선물로 받았다. 며칠 전 무슨 술을 좋아하냐고 직원이 내게 물었던 일이 있었다. 나는 내심 채용 제안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줄을 선 사람들은 이미 충분한 것 같았다.


인턴십 마지막 날 나는 술을 선물로 받았다.

실습수업을 시작할 때 나는 마크에게 학생회 일은 왜 실무로 쳐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한 적이 있었다. 그게 현장이 아니면 나는 뭐가 현장인지 모르겠다는 입장이었다. 마크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학생회는 영상 전문업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 실습수업 전부터 해왔던 일이고 돈까지 받고 있으니 인턴쉽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미 하고 있는 일로 학점을 받으면 다른 학생들에게 불공평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실습수업이란 제도에 대해, 마크가 말하는 공평함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 일자리 잡기 쉬우라고 실습은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게 이미 일자리가 있다고 새로운 실습 자리를 찾으라는 말이었다. 돈을 벌고 있으니 100시간의 공짜 노동을 제공하라는 말이었다. 그게 인턴십이 비판을 받는 이유였다. 학생들의 취약한 위치를 이용해 거저 노동으로 부려 먹는다는 점, 정작 현장이란 곳에선 복사기만 돌리고 커피 심부름만 하다 끝난다는 점들 때문이었다. 데이브의 회사에서도 내가 배운 실무란 거의 없었다. 직원을 보면 단순한 편집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대체 그와 나의 차이는 무얼까 궁금하기만 했다.

또 친구와 친척이란 끈이 있어서 인턴 자리를 찾는 호주 학생들을 보면 공평의 저울은 누구 쪽으로 기우는지 의문이었다. 인턴십을 조사하다가 나는 암시장을 발견했다. 외국인 학생들에게 인턴십을 연결해주는 중개인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영어도 잘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지만 학점은 받아야만 하는 우리의 어려움을 이용해 돈을 주고 인턴십을 사는 체계였다. 모든 게 못마땅했지만 연락은 해보았다. 천불을 내라고 했다. 공짜로 일하겠다는데 거기다 돈까지 내라니 도둑질도 이런 도둑질이 없었다.

인턴십을 왜 하는지 아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일을 배우기 위해 보수 없이 근무하는 건 양측이 합의만 한다면 문제가 없다가 본다. 그러나 학생 개인의 정황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무보수의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학교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차비나 밥값 한 푼 지원해 주지 않으면서 규정이 그러니 스스로 해결하라는 건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대학들이 제일 쓰기 좋아하는 마케팅 문구는 ‘Job ready’였다. 공부를 마치면 바로 취업할 수 있는 교육이 요즘은 최고기 때문에 마케팅 캠페인을 할 때마다 모든 학교가 입을 맞춰 쓰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학교가 내 발목을 잡는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또 다른 예로는 교내 장비대여소에서 겪은 일이었다. 우리 학과 학생들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다른 과 학생들의 무도회에서 사진을 찍어주기로 고용이 돼서 카메라 플래시를 빌리려고 했다. 대여소를 담당하는 일리야라는 직원은 방학중에 장비를 빌리는 내가 이상했는지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다. 무도회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했더니 그런 용도로는 빌려줄 수가 없다며 엄격하게 수업용으로만 쓰게 돼있다고 했다. 학교 행사라고 설명을 해 보아도 돈을 받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마크를 찾아갔다.  그러나 마크는 일리야 편이었다. 장비는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정 필요하면 사설 업체에 가서 빌리라고 했다. 난들 안 알아봤겠는가. 사설 업체들은 외국인에게는 대여를 해주지 않았다. 모든 곳이 호주 시민 신분증을 요구했다. 도망을 갈 수도 있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여권 같은 걸 맡기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Why don’t you buy your own if you need it so badly." 마크는 마크답게 뭐가 문제냐는 듯 말했다

"It’s expensive." 내가 말했다.

"That’s not my problem."


분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서 나는 학과장보다 높은 학부장에게까지 전화를 했다. 학부장은 자기 영역이 아니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렸다. 학부장과 학과장 사이에 있는 어느 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녀도 일리야와 마크에게 동조했다. 학업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닌 건 나도 인정을 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하는 일이고 학생들 경력과 취업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적극 권장해주는 게 맞지 않냐는 게 내 입장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짜증을 냈다. 정 따지고 싶으면 학생복지부에 가서 정식으로 항의하라고 일축했다. 웬 일개 학생이 말도 안 되는 일로 귀찮게 군다는 듯한 태도였다.

카메라 플래시 하나 빌리겠다는데 전 직원이 한통속이 되어 나를 막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내가 학교에 내는 돈이 얼만데. 학교는 내게 뭘 해줬는데.


그 후로 대여소를 찾는 일은 없다. 좋은 장비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리야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뭘 하는지 방학에도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리야를 보면 삼척동자도 할 수 있는 일을 몇 년씩 꿰차고 앉아 학생들을 상대로 권력 놀이하는 꼴이 사나웠다. 일리야는 학생들 사이에서 어딘가 음침하고 기분 나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여학생들이 일리야를 싫어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리야를 글을 쓰며 몇 년 만에 떠올렸다. 그와 있었던 하찮은 갈등을 기록해나가며 그의 이름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을 했을 때였다. 결과에 뜨는 건 “Uni Staffer’s Porn Protest Fails”란 제목의 2020년 기사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학교 IT 부서에서 장비대여소의 컴퓨터가 망에 잡히지 않는 걸 수상하게 여겨 조사를 했더니 거기서 어마어마한 양의 포르노가 발각된 것이었다. 일리야는 당연히 해고를 당했다. 근데 일리야는 사생활 침해라며 도리어 학교에 소송을 걸었고 패했단 이야기였다.

그 망신을 당하고도 오히려 맞고소라니 일리야의 뻔뻔함도 두둑했다  아주 이상한 인간이었다. 그가 대여소에서 일할 때 무슨 티브이 쇼를 직접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루는 집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지역 방송국 채널에 나오는 그의 쇼를 발견했다. 일종의 리얼리티 쇼였는데 참가자들이 한 집에서 생활하면서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고 배신을 저지르기도 하며 투표를 통해 한 명씩 탈락시키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형식이었다. “Survivor”란 미국의 유명 프로그램을 베낀 것이었다. 대신 원작에선 장소가 열대의 지상낙원 섬인데 반해 일리야의 쇼는 멜버른의 한 보간 동네의 가정집을 배경으로 했다. 출연자들은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었고 진행자는 일리야 본인이었다. 집 뒷마당에 모여 작당모의를 펼치고 탈락시킬 경쟁자를 사뭇 진지하게 투표하는 장면을 보면 실소만 나왔다. 그런 웃음을 위해 만든 패러딘가 싶기도 했지만 일리야란 사람을 생각하면 패러디란 너무 높은 수준의 유머였다. 그걸 몇 시즌이나 찍어 지역 방송국에서 틀었다. 한 시즌이 끝나면 출연자들이 다시 모여 지난날을 회상하는 ‘리유니온'까지 찍었다. 촬영지는 학교 스튜디오가 분명했다. 장비도 학교 걸 썼음이 분명했다.

맨날 학교에 나와 무슨 짓을 하나 했더니 그는 리얼리티 쇼도 만들고 포르노도 보느라 바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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