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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Oct 08. 2022

등록금을 내지 못해 직원에게 빌었다.

등록이 취소되고 호주에서 쫓겨나는 상상은 끔찍했다.

빅토리아 대에 영상을 전담하는 자리가 있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카메라와 편집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아는 직원들이 가끔 영상을 만드는 게 다였다. 큰 예산의 홍보는 외부 업체에 맡겨왔지만 그렇게 어쩌다 한 번 하는 마케팅 외에도 영상이 필요한 곳은 많았다. 그걸 세바스찬과 내가 시작한 것이었다.

세바스찬이 학교를 졸업했을 때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부담감이 대단했다. 그러나 자리에 오르면 어떻게든 업무는 수행하는 법이었다. 학교 행사가 있으면 나는 작정 없이 카메라를 들고나가서 닥치는 대로 영상을 찍었다. 카메라는 오토 모드 밖에 몰랐고 렌즈에 대한 이해도 전혀 없었다. 파일 포맷도, 조리개 값도, 셔터 스피드도, 화이트 밸런스도 몰랐다. 어쩔 땐 영상이 부드러워 보였고, 어쩔 땐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게 프레임률의 차이란 것도 몰랐다. 찍어만 두고 편집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 그게 어느 수준까진 통했다. 엉망으로 찍어놓고도 편집의 잡기를 부리면 사람들은 쉽게 놀랐다.

영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부서는 학생회뿐만이 아니었다. 영상이 학교 페이스북에 올라가고 내 존재가 알려지자 다른 부서에서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영상은 만들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다른 부서와도 교류를 하고 프로젝트를 맡기 시작했다. 그들과 일할 때는 프리랜서 계약서를 쓰고 시급을 받았다. 그 돈 버는 재미가 좋았다.

내겐 아직 내 소유의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학생회에서 빌려 썼다. 학생회는 기꺼이 쓰게 해 줬다. 내가 장비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라 믿었고 내가 아니면 쓸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학교 곳곳을 누비며 영상을 만들었다.


사무실에 모인 학생회 직원들

대학교에서 일하는 것은 큰돈이 됐지만 매 학기 등록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고스란히 돌려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걸 다 메울 만큼 벌지는 못했다. 새 학기가 다가올 때마다 이번엔 또 어떻게 그 돈을 준비할까 하는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어떻게든 등록금을 내면 잠깐 안도가 됐다가  새 학기가 다가오면 불안은 솟구쳤다. 학교에서 독촉을 받는 게 일상이 됐다. 빨리 잔금을 치르지 않으면 등록이 취소된다는 통보를 수차례 받았고 나는 어떻게든 봐 달라고 사정을 해야 했다. 등록 취소는 곧 비자의 취소였다.

돈을 아끼려고 버스비도 내지 않는 지경이었다. 멜버른의 버스 운전사들은 승객이 돈을 내지 않아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트램도 마찬가지였다. 메트로는 게이트가 있었으니 무임승차가 어려웠지만 버스와 트램은 승객의 반 정도가 삯을 내지 않는 것 같았다. 버스든 트램이든 메트로든 사복 직원들이 순찰을 한다는 경고문이 곳곳에 보였다. 그렇게 걸리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메트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열차 양쪽에서 나타나는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가운데를 향해 좁혀오며 승객 모두의 카드를 일일이 확인했다. 기계에 갖다 댔을 때 카드를 찍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기록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사복 직원을 구분하는 법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가 되기도 했다. 특유의 옷차림이 있었다. 보통 크로스백이나 힙색을 메고, 헐렁한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이었다. 스포츠 선글라스도 흔했다. 쉽게 말해 보간 패션이었다.

멜버른에 산다면 무임승차 벌금은 꼭 한 번쯤 내기 마련이었다. 버스나 트램 운전사들의 제재가 없으니 비용을 내지 않고 타기가 당연한 것이 되고 거기에 익숙해졌다가 언젠가는 걸리는 법이었다. 특히 트램은 타고 내리기가 간단한 데다 한두 정거장 가려고 돈을 내는 게 아깝게 느껴졌기 때문에 무임승차의 유혹이 컸다. 내게도 아슬아슬했던 적은 있었지만 멜버른에 사는 4년 간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무임승차를 대충 넘어가 주던 문화도 언젠가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버스에 탔더니 카드를 찍으라고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여태껏 아무 말이 없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그 후로 나는 버스에 타기 전 기사의 인종부터 보는 버릇이 생겼다. 백인이면 카드를 찍는 쪽을 택했다. 그들의 권위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유색인종이라면 일단은 내지 않고 올랐다.


나는 학교 곳곳을 누비며 영상을 찍었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주변에서 돈까지 꿔야 하는 지경이었다. 믿는 친구들로부터 겨우 몇 백 불을 빌릴 수 있었다. 심지어는 친하게 지내던 학교 강사에게까지 부탁을 했다. 비디오 프로덕션 수업을 가르치던 파올라라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수업 첫날부터 나는 모든 질문에 답 잘하는 우등생이 되어 파올라의 관심을 받았다. 그녀에게 멘토가 되어달라는 부탁까지 한 일이 있었다. 멘토란 게 정확히 뭘 하는 관곈진 몰라도 학교 다니다 보면 멘토 중요하단 소리는 맨날 들었기 때문이다.

파올라에게 오랜만에 만나고 싶다고 내가 연락을 했다. 그녀의 수업을 들은 지 거의 1년이 지났을 것이다. 캠퍼스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무슨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냐,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질문만이 맴돌았다. 자리를 뜰 분위기가 되자 나는 용기를 내어 파올라에게 말했다. “There is a reason I wanted to see you today.”

주변 사람들에게 보증을 서달라거나 보험을 사달라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그 부탁하기 위해 약속을 잡고, 커피를 마시고, 요점 없는 대화로 상대방의 눈치를 보는 처지가 초라했다.

“I was wondering… If… I could borrow some money from you.”

파올라는 난처하게 웃으며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얼마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남은 등록금은 몇 천불이 됐다. 그걸 다 빌려달라는 건 말도 안 됐다. 나는 파올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3백 불 정도?

파올라는 거절했다. 그녀에게도 사정은 많았다. 자기도 형편이 좋지 않다고 했다. 학교에서 일을 하는데도 아직 적당한 집을 구하지 못해 멀리 사는 어느 친구 집에서 몇 시간을 운전하며 다닌다고 했다. 또 학생 때 대출받은 학비를 아직도 안 갚아서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통고장이 따라다닌다고 했다. (안 갚고 계속 피하다 언젠가 증발하길 바라는 것일까?) 파올라는 장학금이나 대출은 알아봤냐고 물었다. 물론 모든 방도를 다 조사해봤다. 답이 없어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파올라가 제안을 했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를 하나 찍었는데 그걸 편집해주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나에겐 반가운 소리였다. 그냥 돈을 꾸는 것보다 일을 하고 받는 게 나도 훨씬 마음이 편했다. 파올라는 이미 대부분의 편집을 다 해놓은 상태였다. 거기서 내가 더 손봐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다만 프로그램은 파이널 컷 7만 써야 된다고 했다. 파이널 컷은 애플에서 만든 영상 편집 프로그램이었는데 7이면 아주 오래된 버전이었다. 프로그램이 대대적으로 바뀐 지가 오래였지만 파올라는 옛날 버전을 고집했다. 파이널 컷 7은 이상하게도 요지부동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최신 버전은 너무 단순하고 쓰기 쉬워졌다며 이전의 복잡하고 투박한 파이널 컷을 더 우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영화는 아날로그 필름이 우월하고, 전자책은 책으로 치지 않는 사람들과 같은 심리였다. 신기술에 보이는 막연한 거부감이었다. 에어 팟이란 게 처음 나왔을 때 줄 없이 귀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이상한 장치를 누가 쓰겠냐며 보였던 내 반응과도 마찬가지였다.

파이널 컷 7은 잘 모른다고 했더니 편집을 맡기지 못하겠다고 했다. 파올라는 애초에 돈을 빌려줄 마음이 없었다.


신장개업한 카페에서 촬영을 해주는 나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결국 나라에서 쫓겨나는 상상은 끔찍했다. 그동안 학교에 투자한 돈, 시간, 쌓아둔 경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돈을 내지 못하면 내 인생은 그걸로 끝인 것만 같았다.

몇 차례 독촉을 받은 후 나는 학교 등록금 담당 직원 사무실에 불려 나갔다. 직원은 내 등록 취소가 코앞이라고 했다. 정 방법이 없으면 모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대부분의 외국 학생들이 그랬으니까. 근데 내가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안 했을까? 더 이상 보내 줄 게 없는 걸 아니까 안 했지. 담당자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돈이 생기면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현실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으름장에 가까웠다.

수치심과 절망으로 마음이 엉망이었다. 제발 내쫓지 말라고 구걸하는 꼴이었다. 돈을 안 내겠다는 게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시간만 있다면 돈을 벌 수 있음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꾸준히 일하고 있었고 외부에서도 프리랜스 일이 종종 들어왔다. 작은 사업체나 개인들과 연줄이 닿아 영상 만들어 주는 일들을 예상치 못하게 해오고 있었다. 프리랜스는 한 프로젝트 당 적게는 천불에서 많게는 몇 천불의 돈을 받았다. 이런 건을 한두 번만 더 잡을 수 있다면 등록금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에 생기는 일이 아니었다.

나와 면담을 한 등록금 직원은 나와 아는 사이였다. 학생회와 같은 층을 쓰며 처음 안면을 탔고 그 후로도 학교 행사에서 만나며 조금씩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데이팅 앱에서 내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는 남자였다. 그와 한 사무실에 앉아 등록금을 얘기하는 자리가 아주 어색했다. 차라리 겉치레를 다 던져버리고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이러지 말자고 툭 터놓고 싶은 심징이었다. 그러나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그에게서 다시 한번 등록금 연장을 받아내고 사무실을 떠날 때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힘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학비는 못 냈어도 학교는 계속 나갔다. 여느 때처럼 수업을 가고, 사무실에서 일하고, 도서관을 들락거리고, 행사를 촬영했다. 그러나 매 순간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언제 퇴학 통보를 받을지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었다. 돈 문제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무실에서 영상을 편집하는 모습

그러던 어느 날 스크린 미디어 학과장 마크로부터 영상 콘테스트가 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자동차용품 회사가 30초짜리 UGC 경연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우승자에게는 상금 2만 불과 전국에 티브이 광고로 방영되는 특전이 주어진다고 했다. 이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30초 영상은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디어만 기발하면 됐다. 대중들의 영상을 모집한다는 건 재밌고 신선함을 찾는다는 뜻이었다. 빠르게 대본을 쓰고 영상에 출연할 여자와 남자를 섭외했다.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친구의 친구들이었다. 장소까지 잡아놨다. 나름 전문가 카메라와 조명과 마이크까지 준비해서 촬영을 했다. 촬영은 한 시간 만에 마쳤다. 그날 편집도 바로 끝냈다. 그리고 완성된 영상을 보냈다.

2만 불은 이미 내 것인 것 같았다. 그 돈이면 등록금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했다. 사무실 사람들에게도 내 영상을 보여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다. 선정된 영상들을 봤는데 그리 대단치 않은 것들이었다. 내 상금을 뺏긴 기분이었다. 1등은 못해도 입상 정도는 해야 말이 됐다.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만큼 상금이 필요한 사람이 없을 거란 생각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딘가에서 편히 살고 있을 중산층 백인 영화 지망생 우승자를 상상하며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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