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찬은 새 사람이 생길 때마다 내게 보여줬다.
세바스찬은 연애를 하고 싶어 했지만 온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두 번의 데이트만으로 쉽게 사랑에 빠지는 새바스찬에 비해 상대방들은 한두 번의 잠자리 후 연락을 끊길 원했다. 세바스찬은 모든 만남과 헤어짐을 내게 낱낱이 털어놨다.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 같다며 새로운 사람에 대해 조잘조잘 떠들다가 며칠 후엔 울상으로 한탄을 했다. 그토록 한 사람만을 원하는 세바스찬을 보면 남자는 섹스를, 여자는 로맨스를 원한다는 고정관념도 틀린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상처를 받으면 세바스찬은 새로운 데이트로 회복했다. 온라인이 아니어도 만날 사람은 많았다. 적어도 세바스찬에겐 그랬다. 그는 어딜 가나 카리스마와 매력으로 사람들을 금방 휘어잡았다. 남자들과는 금방 친구가 됐고 여자들에게는 흠모를 받았다. 그래서 드가니의 패륜아 크리스와도 원만히 지낼 수가 있었고, 외국인 학생회에서도 모두의 존경을 받는 회장이 됐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처음 진지하게 만난 사람이 피아라 Fiara 였다. 중국 교환학생이었던 그녀를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세바스찬은 집에 그녀를 초대했다.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여전히 초라하고 차가운 거실에서 우리는 세바스찬이 만든 보쉬트 Borscht를 먹었다. 나는 피아라가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산에 캠핑을 갔었다며 보여주는 사진이 있었다. 아주 높은 지대였는지 피아라의 얼굴은 통통 부어 있었고 바싹 마른 입술과 헝클어진 머리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꼭 헐벗은 농민의 모습이었다.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바스찬은 피아라의 소박한 성격이 좋다고 했다. 자기가 아름다운 걸 모른다고 했다. 피아라의 전 남자 친구가 피아라의 자존심을 상당히 짓밟은 모양이었다. 얼굴과 몸매를 왜 더 가꾸지 않느냐고 다른 여자들과 비교를 했던 것이다. 세바스찬은 그런 피아라에게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고 했다.
하지만 교환학생인 그녀와 무슨 앞날을 예상했는진 모르겠다. 학기가 끝나자 피아라는 호주를 떠나야 했다. 둘은 공항에서 생이별을 했다. 물고 빨며 눈물의 뮤직비디오를 찍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멜버른으로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자고 약속했지만 얼마간 연락을 이어가다 둘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세바스찬에겐 그랬다. 그는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기 시작했지만 피아라는 세바스찬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들이 그랬다. 지난 약속들은 다 잊었냐며 대상은 기재하지 않았지만 세바스찬을 향한 게 분명한 넋풀이를 계속했다.
세바스찬의 새 여자는 수업에서 만난 베트남 여인 비 Vi였다. 풍부한 입술과 비단 같은 머릿결의 비는 피아라와는 반대로 무척 여성적인 사람이었다. 하늘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잘 입었고, 리본 달린 모자를 쓰고 꽃 옆에서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만남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비는 세바스찬의 방에서 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의 방에서 여성의 손길이 묻어나는 게 확연했다. 방향제는 닫힌 문 사이로 풍겨올 정도로 물씬했고 침구는 깨끗하고 아늑해졌다. 그렇게 잦은 밤을 보내던 둘이 어느 날 크게 싸웠던 적이 있었다. 얄팍한 붙박이장을 넘어 내 방으로 그들의 목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뭘 갖고 싸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You said this!" "No, you said this!" 하며 서로의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끝없는 다툼이었다.
비와도 헤어졌다. 그리고 캐서린이 나타났다. 캐서린은 세바스찬 전전에 외국인학생회 회장을 맡았던 사람인데 역대 회장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눈이 맞은 것이다. 빅토리아 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직원 자리까지 오른 캐서린은 인생의 전성기를 사는 여자였다. 세바스찬은 첫 만남부터 ‘외모도 아름다운데 머리까지 좋다’며 그의 구애 공작을 펼쳤고 캐서린과 약속을 잡는 데 성공했다. 물론 나를 초대한 저녁식사도 있었다. 세바스찬은 새 사람이 생길 때마다 내가 보는 눈도 중요하다며 꼭 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캐서린이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고학력, 고소득에 교내 각종 학술 단체를 이끌며 인정을 받는 그녀는 세바스찬에 비해 너무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세바스찬은 아직 석사 학생이었다. (교직원과 학생이라는 둘의 신분을 그때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다른 학과라 둘이 마주칠 가능성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와 대학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강사와 학생은 사제 관계라기보다 사회인 대 사회인에 가까웠다. 학생들 중에서도 강사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업이 있거나, 결혼을 한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다.)
음력설이 다가오며 외국인학생회에서는 설 행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은 캐서린이 이끄는 중국학회와 힘을 합쳐 제법 큰 축제를 열기로 결정했다. 둘은 일과 연애의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둘의 뛰어난 추진력으로 행사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그러나 성격의 충돌도 있었다. 서로의 자존심과 고집의 수준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것으로 다툼이 잦던 그들 사이에 캐서린이 일침을 놓는 일이 생겼다. 세바스찬에게 ‘아직 학생이라서 실무를 모른다’는 말로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세바스찬은 로레알과 펩시라는 대기업 경력을 훈장처럼 여겼지만 캐서린은 겨우 인턴 아니었냐며 가볍게 무시했다.
며칠 후 세바스찬은 울상이 되어 나를 찾았다. 캐서린과 한 번 크게 다툰 모양이었다. 세바스찬은 캐서린을 진지하게 만날 의도였지만 캐서린은 세바스찬이 자기와 비슷한 수준에 오르지 않는 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 “What can you do for me?”라고 캐서린이 물었을 때 세바스찬은 해줄 말이 없었다. 침울한 세바스찬의 고민을 들으며 우리는 거리를 걸었다. 세바스찬은 울먹이며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앞뒤 잴 것 없이 사랑에 빠졌으나 그게 그를 너무 힘들게 했다. 세바스찬은 사랑을 하는 것도, 눈물을 보이는 것도 이렇게 거리낌이 없었다.
석양이 지는 사우스뱅크를 조금 걷다 보니 세바스찬의 마음도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캐서린에게 자기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힘들 때마다 옆에 있어 주는 내가 고맙다고 했다. 내가 한 일이라곤 같이 걸으며 얘길 들어줬을 뿐이었다. 나는 연애에는 아는 게 없었다. 이성애의 관계라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잠자코 고민을 들어주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는 건 알았다. 충고나 조언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쌓인 걸 비울 시간을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은 하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실은 알고 있곤 했다. 모른다고 믿는 것뿐이었다. 행동에 옮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면 스스로가 직관적으로 내린 결정이 있지만 남이 다시금 확신을 시켜주길 바라는 마음에 묻는 것이었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지 보기 위함이었다. 가게에서 음식 주문하는 사람들이 종종 그랬다. 파이 페이스에 와서 뭐가 제일 잘 나가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늘 다진 소고기 파이 Mince pie가 인기가 많다고 대답했다.
"I don’t eat meat."
"How about the vegetarian pie?"
"I want something light."
"Like a sandwich?"
"I'll just have a coffee."
캐서린은 도도한 성격만큼이나 취향도 비쌌다. 셋이서 쇼핑몰을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캐서린의 뒤를 따라 루이비통에 들어갔다. 럭셔리 브랜드라고는 생전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캐서린은 세일을 하는 가방 두 개를 샀다. 그리고 쇼핑백을 우리에게 맡겼다. 거의 평면 TV만 한 가방 두 개를 덜렁거리며 쇼핑몰을 다니는 내가 한심했다. 그게 나에게는 불길한 조짐이었다. 콩깍지가 씐 세바스찬에겐 그걸 보는 데 훨씬 오래 걸렸다. 사랑과 권력의 시소 타기가 계속되자 그도 곧 지치기 시작했다. 캐서린은 끝까지 세바스찬이 성에 차지 않았고 세바스찬도 그런 캐서린에 질려버렸다.
연애는 끝났지만 설 행사는 여전히 준비 중이었다. 설이 다가오며 일의 스트레스가 커지자 둘의 신경전도 맹렬해졌다. 힘을 합쳐 획기적인 축제를 열어보자던 그들은 이제 서로를 헐뜯는 적수가 되었다. 이들의 싸움에 나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행사를 마친 후 캐서린은 내가 촬영한 영상을 자기가 써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세바스찬은 외국인 학생회의 소유니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검토는 무슨 검토? 세바스찬은 어렵게 굴고 싶었을 뿐이었다. 며칠 후 세바스찬 몰래 캐서린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가 잘 가는 비싼 카페에서 커피까지 사들고 영상을 부탁했다. 내 외장 드라이브를 넘겨줬다. 별 볼 일 없는 영상이었지만 세바스찬도 캐서린도 유난을 떠는 게 우스웠다.
독일에서 온 세바스찬의 옛 여연, 아이사 Ais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