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기억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by 유아영

나는 유년기 시절,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였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서도, 나는 언제나 장난기 많고 활발한 아이였다. 복도를 뛰어다니다 입이 찢어지기도 했고, 학교에서 하는 야영, 스카우트 활동으로 모험심을 키웠다. 놀이터에서는 작은 왕국에서 펼치던 '상상게임, 손끝의 모래성, 어른의 세계를 흉내내던 작은 역할극' 등 친구들과 마음껏 상상하며 놀았다. 지금 아이들은 화면 속 세상에서 노는 스마트폰 세대지만 , 내 세대에게 그 시간들은 온전히 우리의 세계였다. 그래서인지 그 기억들은 더욱 풍부하고 오래 남는다.


우리 집은 도로 바로 옆에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차로 5분 거리였지만, 걸어가기에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래서 통학버스나 부모님의 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도로 옆에 살다 보니 먼지를 많이 먹고, 늘 조심해야 했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현대시멘트 회사에 근무하시다가 퇴사 후, 새로운 직업으로 농사를 선택하셨다. 어머니는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대로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 때문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어머니와 언니와 나는 아버지의 엄격함 속에서 규칙대로 행동해야 했다.


농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밭에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라, 신생아를 돌보듯 정성을 들여 식물을 키워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를 미워하기도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아마 마음이 진정될 수 있는 때는 10년쯤,20년쯤 후가 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버티며 가족을 지켜주셨다. 아버지의 농사로 인해 빚이 생기고 생활이 어려워졌을때도, 어머니는 모든 일을 처리하며 가족을 지탱했다.


엄마라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매일의 일상과 책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를 지켜주는 힘.

그 힘은 단단하고 묵묵하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삶의 무게를 받아내고 있었다.

엄마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지금도 그 단단함에 마음 한켠에서 감사와 안정을 느낀다.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잘 지내고 적응도 잘했지만, 아침에 부모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불안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사람의 감정은 알다가도 모르기에, 유독 민감한 부분에는 마음이 흔들리며 마련이다. 어쩌면 나는 유년기 시절 평화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유별나시고 때로는 무서웠기에, 나는 그때 아버지를 '아버지' 또는 '아빠'라고 부르기 어려운 계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년기에는 순수한 즐거움과 모험이 존재했다. 친구들과 뛰놀고, 장난치고, 상상하고, 배운 것들. 그 모든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맞벌이로 우리를 키우시며 최선을 다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태어난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처음부터 부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가난과 싸우며 노력한 끝에 지금의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년기의 나는, 때로는 부모님의 울타리 속에서 긴장하며 부축이며 살았지만, 동시에 친구들과 놀이터와 모험 속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좋았던 기억과 힘들었던 기억이 뒤섞인, 그래서 더욱 풍부한 유년시절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아직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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