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수업 시간에 배운 것 같다. 제주도 하면 삼다도라고 해서 돌, 바람, 여자가 유명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제주도 와서 첫 봄비가 내렸는데 확실히 부산보다 좀 더 '싸납다'. 그제야 '아! 제주도 바람이 유명하다고 했지?' 바로 피부로 느낀다. 비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때리는데 이거밖에 나가면 위험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봄비가 내리기 바로 전날, 우리 아들내미 딸내미 너무 덥다고 웃옷까지 벗고 '난닝구'만 입고선 신나게 공을 찼었는데 이거 뭐 날씨가 지금은 겨울이다.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고 강해서 한동안 옷걸이 구석에 찬밥신세로 있던 패딩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집 근처에 미술관도 있고, 딸 좋아하는 도서관도 있고, 아들 좋아하는 놀이터도 있고, 무엇보다 밥도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 정확히 차로 8분 거리다. 목적지는 바로 '기당 미술관', '삼매봉 도서관', 그리고 '삼매봉 153(구내식당)'이다. 다 줄줄이 옆에 있다. 차에서 내렸는데 미술관 위치가 언덕배기에 있어서 바람이 아래보다 훨씬 더 매섭다. 멀리 한라산도 구름에 바람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미술관에 생전 처음으로 왔는데 들어오자마자 딸내미 입이 삐죽 나왔다.
"아빠, 나 도서관 갈래. 여기 재미 하나도 없어. 그림만 있고 뭐야?" 하며 둘러보지도 않고 다시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과'랑 '연탄'도 물어봤지만 딸아인 본체 만 체다. 아내가 아이들을 도서관으로 데려가 줘서 혼자 한 10분 정도 그나마 그림을 제대로 본다. '변시지' 화가의 그림이 내게 울림을 준다. 세 찬 파도와 말 그리고 한 남자와 집. 색감이 토속적이고 내용이 단순하다. 미술을 전혀 모르지만 이중섭 작품 느낌도 살짝 나고 뭔가 외로우면서 제주도와 자연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고독이 찐하게 느껴진다.
변시지 화가의 그림
딸내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내가 온지도 모른다. 그동안 가 본 '기적의 도서관', '서귀포 도서관'은 아이들 책 읽는 곳이 잘 되어있는데 여긴 열람실 위주다. 아이들 책 보는 곳이 책으로만 가득 차 있고 앉을자리도 없다. 출입문 앞, 화장실 바로 옆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아들딸 아내다. 곧 리모델링을 하는 모양이다. 아들 내민 날 보자마자 심심하다며 놀러 가자며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간다. 슬쩍 오늘 점심 먹을 '삼매봉 153(구내식당)' 안을 봤는데 사람도 별로 없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다시 가게 안으로 왔다.
가격이 일단 저렴하다. 메뉴당 6,000원 정도다. 비빔밥, 제육덮밥, 짜장면, 그리고 돈가스를 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셀프 코너에서 미역국과 수저를 챙겨 왔는데 우리 아들딸 미역국이 주메뉴인 줄 알고 10초 만에 후딱 다 비웠다. 밥도 가져오고 미역국도 한 그릇 더 가져오라고 한다. 주메뉴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미역국 두 그릇과 공깃밥으로 배를 채웠다. 이어 나온 짜장면에 돈가스까지 맛있게 먹고 구슬아이스크림까지 마무리 지었다.
배가 잔뜩 부르니 책 읽는 맛도 더 크다. 놀이터 가자고 떼쓰던 아들도 밖이 추우니 도서관으로 군말 없이 왔다. 딸은 책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고 심심해하는 아들을 위해 엔서니 브라운의 '숨바꼭질'을 하나 읽어줬는데 재밌다며 더 읽어 달란다. 그렇게 오랜만에 아들에게 그림책을 잔뜩 읽어준다. 그런데 제목이 재밌어서 고른 책 하나가 나를 울린다. <얼음 땡>이란 그림책인데 역시나 강풀 작가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26년>, <무빙> 등 한동안 강풀 작가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렇게 그림책으로 만나게 되니 영광이었다. 마지막 얼음을 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나타난 '?' 역시 대박이었다. 한 동안 멍했다. 역시 하찮게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것(사람)의 반전에 감동을 받는다. 다시 복직을 하면 꼭 아이들에게 읽어줘야 할 1순위 그림책이 되었다.
삼배봉도서관에서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다.
바람이 '싸나왔던' 하루. 도서관을 나오니 저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세찬 바람에 구름도 다 도망갔나 보다. 자세히 보니 눈도 보인다. 오늘 하루 아이들과 미술관 구경(?)하고,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저렴하고 맛있게 점심도 먹고, 알차게 하루를 보냈다. 바람 때문에 추위 때문에 한 동안 여행하기는 아직 안 좋은 날씨다. 밖보다는 안에서 더 책도 읽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생각하며 정리하는 시간으로 3월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제주 살이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