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차창을 때린다. 비 오는 4월의 제주 아침, 발로만 항상 걸어 다니다 모처럼 차로 운전하니 쭉쭉 시원하게 나간다. 걸을 때와는 사뭇 다른 이 스릴감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가만히 휴대폰만 보던 아내 갑자기 "지금 비 오는 날 딱 맞는 노래 하나 틀어줄게."그런다.아내의 센스가 느껴진다. 비 오는 날 분위기가 한껏 더 고조된다.
"어느새 빗물이 내 발목에 고이고, 참았던 눈물이 내 눈가에 고이고 I cry........ 그대는 내 머리 위에 우산......"
에픽하이의 <우산>을 아내랑 나 둘이서 목청껏 따라 부른다. 좋다. 좋아. 비 오는 날 제주도 찬 안에서 에픽하이 노래라 감성이 폭발한다. 이어 나온 싸이의 '어땠을까?'도 제대로 취향 저격이다. 둘이서 신나게 가사를 따라 부른다.
"어땠을까 (내가 그때 널)어땠을까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너와 나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어땠을까 (마지막에 널) 어땠을까 (안아줬다면) 어땠을까 (너와 나 지금까지 함께 했을까)"
그렇게 신나게 노래를 불렀더니 오늘의 목적지 '군산오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친구 녀석이 3월에 내려와서 꼭 가보라고 추천한 오름 중의 하나다. 친구 말로는 길이 좁은데 그래도 차로 끝까지 무조건 올라가라고 한다. 역시나 군산오름 올라가는 길, 차 한 대겨우 지나갈 좁은 길이다. 초입에 차 한 대를 만났는데 먼저 비켜 주신다. 고맙다. 올라가는 길, 제발 제발 내려오는 차야 없어라, 하고 빌고 또 빈다. 정상까지 아주 운 좋게 내려오는 차를 만나지 않았다.
정상 근처에 올라왔는데 어 빗줄기가 제법 더 굵어졌다.
"타다타다닥 타다타다닥........."
사정없이 빗방울이 차를 때린다. 빗방울에 산방산과 하늘과 바다가 모두 잿빛 투성이다. 그 회색 풍경에 빗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린다.
4월 봄비오는 군산오름, 차 안에서. by도도쌤
이렇게 비 내리는 날, 차를 들고 온 건 정말 신의 한 수다. 비 오고 기온까지 많이 떨어진 오늘 만일 무리해서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몸 상태가 안 좋은 아내 더 안 좋아져 며칠 고생했을지 모른다. 정상 근처까지 올라온 내 차가 오늘따라 더 멋지고 더 당당하게 보인다. 게다가 이렇게 비까지 피할 수 있으니 더 고맙다! 차에 좀 있었더니 비가 잦아들었다. 거의 그쳐 간다.
고맙다. 내 애마야. by도도쌤
친구 말이 맞았다. 차에 내려 정상까지 10분도 채 안 걸린다. 잘게 잘게 만든 계단들도 오르내리기에 참 좋다. 오름과 산과 올레길을 그렇게 걸었는데 이 계단이 제일 마음에 든다. 한 계단 한 계단 정성 들여 만드신 분들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촘촘한 군산오름 계단들. 너무 고맙습니다. by도도쌤
올랐다 뒤돌아 보고 '우와!', 다시 조금 올랐다 뒤돌아 보고 다시 '우와', 그러다 정상에 오른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친구가 추천해 준 이유가 다 있었다. 360도 올라운드 뷰다. 제주도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경치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뺑뺑 돌았는지 모르겠다.
구름에 가린 한라산에 수없이 많은 오름들이 능선을 타고 쫙 펼쳐지는데 그림이 따로 없다. 거기에 우뚝 솟은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가파도와 마라도까지.직접 가파도와 마라도 가서 바라봤던 풍경과 또 다른 아름다움을 군산 오름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곳곳에 보이는 진지 굴을 보며 역사의 쓴 아픔이 느껴졌다.)
시원하게 제주를 보여준 군산오름 정상. 너가 지금까지 올랐던 오름 중에 최고다. by도도쌤
"지금까지 갔던 오름 중에 여기가 최고다. 아내는 어때?"
"응. 나도 여기가 제일 좋네."
아내랑 통했다. 그래 맞다. '군산오름' 갔던 오름 중에 제일 멋졌다. 꼭 가 보길 바란다. 대신, 성수기에 차를 정상까지 들고 간다면 내려오는 차와 몇 번이나 마주칠지 모른다. 물론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군산오름' 싫어질 수가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아내와 나 다음에는 올레 9코스인 '군산오름' 걸어서 꼭 가리라 약속했다.
군산오름 정상에서 by도도쌤
군산오름 정상에서 by도도쌤
그런데 경치에 취해 추운 줄도 모르고 비와 바람을 맞으며 정상에 오래 있었더니 아내 몸이 춥다. 얼른 따뜻한 점심을 먹고 추운 몸을 녹여야겠다. 미리 알아본 '알동네집 (화순점)'에 제일 첫 손님으로 도착했다.
알동네집 화순점 by도도쌤
삼겹살과 자투리 고기 하나씩에 돌솥밥과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하나씩을 시켰다. 따뜻한 고기에 따뜻한 밥과 찌개를 먹으니 아내 추위가 싹 가셨다. 다행이다. 고기도 맛있고 가격도 적당하고 반찬도 신선하고 주인분도 참 친절하시고 참 만족한 점심이었다. 다음에 한 번 더 올 땐 자투리 고기 3인분에 공깃밥과 된장찌개 하나면 충분할 것 같다. 5점 만점에 4.6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래저래 사치를 누린다. 차로 쉽게 올라가 멋진 오름도 구경하고, 점심을 고기에 돌솥밥까지 먹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다. 이대로 집에 가도 좋지만 이 비 오는 날 차도 들고 왔겠다 제주도 바다를 보며 차 한잔이 또 생각난다. 제주도 3년 살았던 친구가 여기 좋다며 추천해준 카페가 이 근방이다.
<제주 카페 스르륵>
친구가 소개해 준 카페다. 올레 7코스 도로 끝 오른쪽에 위치한 2층짜리 아담한 카페다. 여기 카페 시그니쳐 메뉴인 밀크티와 아인슈페너 한 잔을 시켜 2층으로 올라갔다. 비가 그쳐 갠 바다와 하늘 풍경이 유리창에 적힌 문구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폰을 안 들으려야 안 들 수가 없다. 찰칵찰칵찰칵 글귀를 풍경에 맞추어 열심히 찍는다.
'난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바람. 그런 바람이고 싶었어..'
'살아보니 어디서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더이다.'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한 걸까? 난 잘 살고 있는 걸까?
돌고래가 보였던 년도와 날짜가 창문에 적혀있다. 아내랑 나 돌고래가 혹시 보일라 파란 바다를 그렇게 쳐다본다. 하도 궁금해 "돌고래 진짜 보여요?"라고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돌고래가 보이면 요 앞에 해안선을 따라 가요."그런다. 그 말에 아내와 나 둘이서 돌고래 찾아보려고 또 열심히 파란 바다를 그렇게 쳐다본다.고깃배만 저 멀리 둥둥 떠 다닌다. 하하하하하.
돌고래 보인 날 by도도쌤
아내와 나 역시 카페 스타일이 아니다. 카페 나오자마자 동시에 "나오니까 더 좋네!"라고 소리쳤다. 하하하하하! 맞다. 카페 안 보다 나오니까 훨씬 더 좋다. 비 오고 막 그친 하늘색과 바다색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햇살에 바다가 은빛 물결로 반짝반짝거린다. 여기 아직 못 걸은 올레 7코스길 조만간 다시 걷자고 약속했다.
제주카페 스스륵 앞 풍경 by 도도쌤
오늘 하루 '군산오름'의 360도 올 어라운드 경치에 압도당하고, '알동네집' 자투리 고기와 돌솥밥에 입이 호강하고, '제주 카페 스르륵'의 여유로움에 한껏 취했다. 삼박자가 고루 갖춘 꽉 찬 하루였다.
'이렇게 한 번씩 자신에게 사치를 부리는 날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날이다. 군산오름, 맛집, 찻집 다 강력히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