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을 걸은 게 언제였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아득하다. 8월의 강렬한 햇살이 너무 따가워 엄두가 안 난 게 제일 컸다. 물론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던 물놀이 또한 올레길을 잊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제주 한 달 살이를 끝낸 조카가 부산으로 가고, 아들 딸 여름방학이 끝나니 평화가 찾아왔다. 날씨도 선선하니 걷는 걸 좋아하는 아내와 나 바로 올레길이 생각난다.
지금껏 안 걸었던 올레길을 아내가 쭉 찾아보더니, 14코스를 걷자고 한다. 금능해수욕장과 협재해수욕장을 따라 걷는 길, 아이들 물놀이 때문에 늘 그림의 떡이었던 곳이었다. 전체 코스가 길어 '월령리 선인장 군락'에서 시작해 '한림항'까지만 걷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구름이 잔뜩 있어서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올레길 14코스, 월령리 선인장 군장에서 한림항까지만 걷다. by도도쌤
'월령리 선인장 군락'까지 차를 타고 편하게 왔다. 차에서 내려 올레 패스 도장을 찍으러 가는데 '헉' 예상치 못한 풍경에 아내와 나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뭐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나?'란 물음이 들 정도로 우리를 확 매료시킨다. 윙윙윙 돌아가는 하얀 풍력발전기 한 대를 배경으로 뭉게뭉게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게다가 바다는 애매럴드빛에 영롱하기 그지없으며 검은색 현무암과 삐쭉빼쭉 초록 선인장들은 얼마나 이국적이기까지 한가. 순간 비행기를 타고 내려 어디 다른 나라에 온 느낌까지 들게 했다.
캬~여기가 바로 월령리 선인장 군락이다. 상상도 못한 풍경에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았다. by도도쌤
찰칵!
찰칵!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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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령리 선인장 군락지 by도도쌤
풍경에 취해 사진 찍느라 정신을 못 차리겠다. 아내랑 같이 왔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내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여기 서 보라, 저기 서 보라 그런다. 멋진 풍경에서만 사진을 찍어 주는 우리 아내, 선인장 군락지가 한껏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내 입꼬리가 올라가고 두 눈이 똥그래지고 한없이 기분 좋은 웃상을 하고 있다. 아내가 기분 좋으니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제주에 6개월 살았는데 이런 좋은 곳을 지금까지 몰랐다니 역시나 제주는 캐면 캘수록 계속 나오는 보물섬이 맞다는 걸 또 깨닫는다.
선인장 군락지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금능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을 따라 걷는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에 몸이 비틀거린다. 바람도 무지 세서 몸을 지탱하기도 힘들다. 자세히 보니 돌길 주변에 바람에 흩날리는 미니 강아지풀이 가을이 왔다고 알린다. 내 몸을 낮춰서 강아지풀과 인사를 나눈다. 내 눈에만 보이는 너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아 본다.
강아지풀이 제주의 현무암과 바다와 참 잘 어울린다. by도도쌤
역시 금능은 금능이다. 여기에 오니 물 때깔이 갑자기 애메랄드 빛으로 변한다. 8월 말인데도 사람들이 물속에서 놀고 있는 걸 보니 8월 초 뙤약볕 아래에서 아이들과 사투를 벌였던 힘든 시간이 갑자기 생각난다. 물놀이할 필요 없이 짐도 없이 아주 자유롭게 아내와 둘이서만 걷고 있는 지금이 마냥 행복하다.
2022년 8월 31일 금능해수욕장 모습. by도도쌤
금능에서 협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 내가 그토록 걷고 싶어 했던 길이다.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니 또 다른 금능의 아름다움이 쫙 펼쳐진다. '우와~~~'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나온다. 사진을 안 찍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선인장 군락지에 두 눈을 뺏겼다면 여기서는 마음까지 빼앗길 정도다. 초록 이상향 비양도를 배경으로 에매랄드 바다와 새하얀 백사장이 까만 현무암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다음에 제주에 혹시 온다면 여기 이 길은 무조건 1순위로 걸어야지 다짐했던 곳이 되었다.
금능해수욕장에서 협재해수욕장으로 넘어가는 언덕 길. by도도쌤
협재해수욕장을 거쳐 그 이후 한림항까지는 평탄했다. 롤러장에서 다친 무릎이 시큰거렸지만 끝까지 완주한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수고한 나와 아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기로 한다. 분식집 '명랑 스낵'이다. 한치 튀김과 짜장 떡볶이가 맛있었지만 밥이 없어 아쉬웠다.
분식집, 명랑스낵 by도도쌤
새하얀 풍력 발전기가 파란 바다와 하늘 속에서 윙윙윙 돌아간다. 이국적인 초록 선인장이 까만 현무암 위로 웃고 있다. 새하얀 백사장에 고등학생들이 함박웃음을 보이며 사진을 찍는다. 그 풍경 속에서 온종일 취했던 하루였다. 올레길 14코스 참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