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갑 선생님이 이 오름을 두고 수백 장을 찍었지만 아직도 다 모르겠다던 '용눈이 오름'. 그 용눈이 오름을 꼭 이번 가을에는 가 봐야지 생각하고 오늘 가 봤다. 그런데 주차장이 썰렁했다. 2021년 2월 1일부터 2023년 1월 31일까지 출입제한이라고 한다.
용눈이 오름, 출입 제한(2021.2.1~2023.1.31) by도도쌤
김이 팍 샜다. 용눈이 오름을 꼭 가봐야겠다는 열정만 많았지 정보는 하나도 안 알아보고 간 내 죄다. 하하하. 혹시나 이 글 보시는 분들은 꼭 참고하길 바란다. 아내와 나 2월 1일 되자마자 용눈이 오름 가겠다고 약속을 하곤 플랜 b인 '다랑쉬 오름'을 가기로 한다. 차로 5분 거리고, 김영갑 선생님이 역시나 좋아했던 오름이다.
다랑쉬오름 by도도쌤
'우와! 여기 차들이 참 많다.'
다랑쉬 오름 입구에 차들이 못해도 20대는 넘게 있다. 사람들도 제법 있고 알려진 오름이라 주위 정돈이 잘 되어 있다. 오름은 역시 알려진 곳에 가야 한다. 걷는 길도 잘 닦여 있어 오르기 좋고, 사람들도 있어 전혀 무섭지가 않다.
다랑쉬 오름, 입구 표지판과 입구 계단 by도도쌤
오름 입구부터 계단이 아주 높다. 계단을 새로 설치 한 모양이다. 밟는 촉감이 마치 새집에 들어선 느낌이다. 아내는 기분이 좋은지 저 멀리 혼자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다랑쉬 오름은 계단 오르고 사선 방향 야자수매트 길을 걷고, 이 과정을 4번 정도 반복하면 어느새 정상에 올라가 있다.
사선 야자수매트 길과 아끈다랑쉬오름 by도도쌤
사선 방향 야자수매트 길을 걸을 때, 여기 등산 온 사람들 대부분이 멋진 뷰를 보고 한동안 멍하니 있는다. '아끈다랑쉬오름'을 포함한 들판 뷰가 초록 초록하다. 파란 바다와 하얀 뭉게구름은 덤이다. 높은 건물 하나도 없는 사방이 뻥 뚫리는 이 통쾌함. 원래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게 정상인데. 내가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자연은 내게 묻는다.
들꽃과 죽은 애기뿔 소똥구리 by도도쌤
정상까지 헉헉거렸다. 이 오름 제법 높다. 알고 봤더니 여기 근처에서 가장 높은 오름이라고 한다.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억새들이 정상에서의 360도 뷰와 아주 잘 어울린다. 아내가 길을 걸어가는데 하늘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 든다. 최근에 걸었던 오름 중에 가장 예쁜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다랑쉬 오름 정상 뷰 by도도쌤
여기 '분화구'가 이렇게 크게 넓게 깊게 있을지 상상을 못 했다. 마치 한라산 꼭대기 작은 백록담을 보는 기분이다.(아직 가 보지는 못 했음.) 분화구 가장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애써 참는다. 하염없이 분화구 안쪽에서 "꿩꿩 꿔"거리는 꿩이 순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분화구를 따라서 한 바퀴 걷다 by도도쌤
하염없이 분화구를 보며 걷는데, 구름이 분화구를 가려 분화구가 검은색이다. 그리고 서서히 구름이 이동하면서 분화구도 검정에서 다시 원래 모습대로 변한다. 억새가 나풀나풀 날리는 모습에 분화구를 보며 걷는 이 다랑쉬 오름 정상에서의 기분은 마치 신선처럼 가볍다.
내려오는 길, 아끈다랑쉬오름 (위쪽 연한 갈색이 모두 억새밭이다) by도도쌤
원래는 80~90분 소요된다고 하는데, 1시간 만에 내려왔다. 오름 정상을 걸었던 우리 와는 반대로 친구 내외는 아래 오름 둘레길을 걸었다. 아래 오름 둘레길도 예쁘다고 하는데 다음엔 꼭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끈다랑쉬오름 by도도쌤
내려오면서 봤던 우주비행접시 같이 동그란 '아끈다랑쉬 오름'이 참 예뻤다. 야트막하면서 안정감이 생기는 저 오름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친구 녀석이 가자고 한다. 오늘 다랑쉬오름은 정말 마스터한다.
확실히, 여긴 사유지인만큼 관리가 안 되어 있다. 올라가는 길이 제법 미끄럽다. 한 5분 정도 올라가니 정상에 쉽게 오른다. 여기 정상 억새밭이다. 다랑쉬오름에도 억새가 제법 있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억새 바다다. 억새 파도들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라진다.
억새밭과 친구와 용눈이오름 by도도쌤
"친구야 거기 서 있어 봐! 배경 죽여준다."
'찰칵'
"야! 이거 이번에는 5만 원짜리다!"
어제, 모슬봉 정상에서 내가 친구 부부를 찍어줬던 사진이 만 원짜리라면 여긴 정말 5만 원짜리다. 바람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억새들이 용눈이 오름과 친구의 뒷모습을 '1년 수고 많았다, 그동안 잘 살았다'하는 느낌으로 보듬어 주고 있다. 친구 녀석 사진을 보더니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아내와 나 by도도쌤
아내와 나도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다른 곳은 아직 안 가 봤지만, 억새 사진 장소로는 여기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영화 '연풍연가'에서의 그 억새밭이 생각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친구가 찍어준 사진이 나도 참 마음에 든다. 여기 안 오고 그냥 지나쳤다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 같다.
억새의 향연 by도도쌤
동그란 억새밭을 친구 내외랑 하염없이 한 바퀴 걷는다. 누가 길을 만들었는지 구석구석 길이 다 있다. 억새 물결 속으로 푹 빠져든 느낌, 가을이라는 선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아내는 웃음이 귀에 걸렸다. 억새들로 길이 험하니 꼭 긴바지는 필수다. 한 바퀴 다 보고 내려가니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온다. 여기 제법 억새 사진 찍는 장소로 유명한가 그제야 생각이 든다.
4.3 다랑쉬 굴 by도도쌤
4.3 다랑쉬 굴을 친구가 꼭 보자고 한다. 차로 1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현장에 오니 쓸쓸하기 그지없다. 친구가 '지슬'이라는 영화를 꼭 보라고 추천해준다. 그 이념이 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다. 저 멀리 다랑쉬 오름과 아끈(작은) 다랑쉬 오름이 이 슬픔을 아는 듯 마주 보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