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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 오니 어승생악 어승생악 하는 이유를 알겠다.

by 도도쌤

제주도 1년 살이하러 2022년 2월 23일 날 부산에서 제주로 왔다. 제주도에 살 집을 아파트로 구해서 집에 있으면 전혀 제주에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였다. 하지만 집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저 멀리 한라산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냥 한라산이 아니라 꼭대기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스위스 안 부러운 설산의 한라산이었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눈 덮인 한라산을 보면서 꼭 한 번은 저기 백록담에 올라가야지 하고 마음속의 주문을 외웠다. 그 주문의 70%는 가을날 돈내코 탐방로를 7시간 걸으면서 충분히 욕구 충족이 되었다. 비록 백록담 꼭대기에는 못 올랐지만 한라산 남벽을 바로 눈앞에 보는 것 만으로 한라산을 마음에 품을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뽀독뽀독 눈을 밟으면서 한라산 근처라도 걷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 나머지 30프로는 제주 떠나기 전에 반드시 꼭 눈 덮인 한라산을 걸으면서 설산을 마음껏 눈에 담으리라 생각했다. 그 약속을 들어줄 곳이 바로 '어승생악'이었다.


'어승생악' 말만 들으면 '악!'소리 날 정도로 정말 험한 산이름 같았다. 찾아보니 한라산 근처 오름의 하나로 1시간이면 충분히 오르내릴 수 있는 야트막한 곳이었다. 지인분께서 내가 제주에 산다니까 어승생악이 나오는 프로를 봤는데 그 티브이프로그램 속 어승생악 설산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꼭 한 번 가보라고 했다. 그게 벌써 2022년 3월 초였다.


그 당시, 어승생악이 가고 싶어 아내는 해외직구로 '아이젠'을 구입했다. 그런데 아이젠이 도착할 즘에는 날이 따뜻해져 눈은 보란 듯이 녹아 없어졌다. 자연스레 한라산에 하얗게 덮인 눈도 거의 말끔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젠은 1년 동안 아무 쓸모도 없이 어디 구석에 처박혀 찾을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제주 1년 살이가 거의 막바지가 되니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제주에 눈이 많이 내려 한라산 꼭대기와 주변은 작년 2월처럼 완전히 새하얀 눈세상이 되어버렸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한라산이 오라고 손짓을 한다.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어승생악'을 가 보리라 두 주먹 불끈 쥐어본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아내는 다리가 아파서 못 간다고 한다. 중문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갈 수 있다고 한다. 가기 전에 작년에 샀던 아이젠 2개와 최근에 눈썰매 탄다고 샀던 '방수신발커버' 2개, 그리고 스틱 2개를 챙겼다. 물론, 오름 오르면서 먹을 쌀새우깡 하나와 물과 한라봉 1개도 챙겼다.


여기 어승생악 인기오름이다. 사실, 한 달 전에 눈이 많이 왔을 때 아내랑 어승생악 간다고 여길 11시쯤에 왔는데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튕겼던 곳이다. 얼마나 그 당시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최대한 이번에는 튕김의 아픔을 느끼기 싫어 서둘렀는데 정말로 다행이다. 어리목 주차장은 비록 못 갔지만 그 아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한 3분만 늦었어도 차가 다 차서 주차도 못하고 어승생악을 또 못 갈 뻔했다.



주차를 하고 나니 세상을 다 얻은 듯하다. 어승생악에 드디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소풍 가는 아이처럼 마음이 설렌다. 몸은 출발도 안 했는데 마음은 이미 설산을 누비며 오르는 내 모습과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걸어서 10분 정도 어리목 입구에 도착하니 여기 사람들이 정말 많다. 어리목에서 윗세오름 가는 사람들과 어승생악 가는 사람들로 나뉜다. 마음 같아서는 윗세오름까지 천천히 몇 시간 동안 눈을 보면서 올라가고 싶지만 오늘은 목표가 있다. 바로 한 번도 가지 못한 어승생악이다.


올라가기 전에 장비를 착용한다. 첫 아이템은 바로 '방수신발커버'다. 최근에 눈썰매 타러 갈 때 아내가 한 번 신었는데 정말 반했던 아이템이다. 눈 속에서 놀다 보면 자연스레 신발끝과 옆 부분에 눈이 녹아 물이 되어 늘 양말이 축축하고 찝찝했었다. 하지만 방수커버를 하니 신발에 눈이 들어올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둘이서 '방수신발커버'를 신고 있으니까, 주위 아저씨께서 정말 부러운 듯이 물어본다.

"그거 어디서 샀어요?"

친구가 부끄럼 반 자랑 반으로 힘차게 외친다.

"다이소에 가면 이천 원 해요."

친구에 말에 아저씨 아줌마들이 소곤거린다.

"우리도 다음에 저거 꼭 사요!"

그래 아직 착용 전이지만 양말은 젖을 리가 전혀 없을 것 같아 정말 뿌듯했다.


두 번째 '아이젠' 아이템도 나에게는 신세계다. 아이젠을 태어나서 처음 신어 본다. 먼저 신은 친구가 땅에서 발을 구르더니 "이거 완전히 축구화 신은 느낌인데!"라고 한다. 나도 다 신고 한 번 걸어보니 축구화 처음 신었을 때 느낌이다. 신발 아래 철 칭이 창창창 거린다. 눈 내린 축구장에서 아이젠 신고 축구하면 참 재밌겠다는 상상까지 다 해 본다.


마지막 아이템 '스틱'까지 챙기니 이건 뭐 설산 준비 완료다. 마치 어릴 적 많이 하던 보글보글 '천하무적'이 된 느낌이다. 게임 속 공룡이 노란 사탕(거품이 빨리 나간다)과 보라사탕(거품이 멀리 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빨간색 신발(속력이 3배 정도 빨라진다) 3개를 다 장착했을 때 그 기분이다. 하하하.



그 천하무적인 상태로 어승생악을 눈길을 걸으니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 눈길인데도 하나도 미끄럽지 않고 착 붙은 상태로 쉽게 쉽게 눈길을 걸을 수 있다. 방수커버를 했으니 눈이 들어올 리도 없다. 스틱도 있으니 손으로 갈 곳을 찍고 한발 한발 천천히 안정감 있게 걸을 수 있다.



앞서 가시는 분들의 아이젠을 보니 아이젠 모양이 조금 다르다. 우리 아이젠은 전체적으로 발을 다 감싸는 아이젠이라면 그분들의 아이젠은 띠 형식으로 중간만 착용하는 부분 아이젠이다. 그 부분 아이젠이 헐거운지 눈길을 오르다 자주 떨어진다. 그분들이 순간 우리 아이젠을 바라보는데 참 부러워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설산을 오를 때는 무조건 전체 아이젠이 필요하니 꼭 착용하길 바란다.(아이젠 안 신고 정상까지 오르는 분도 봤다. 너무너무 위험하니 절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젠 착용하고 눈길을 걷는 이 느낌은 제주 1년 살이하고 처음이다. 차박차박 눈 밟는 소리가 정겹다. 따뜻한 햇살에 눈이 녹아서 나뭇가지에 쌓여있던 눈이 투두둑하며 떨어진다. 순간 산 짐승이 왔나 싶어 뒤돌아보는데 눈이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반동으로 움직인다. 친구는 눈이 녹아서 떨어지는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 겨울 낮기온이 15도다. 오름을 오르니 두꺼운 겨울 점퍼 때문에 덥다. 땀이 삐질삐질 이마와 등에서 난다. 올라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점퍼를 손에 들고 오르기 시작한다. 산에 눈이 있어 추울 줄 알았는데 땀이 나는 희한한 경험이다. 어디 점퍼 맡기는 곳이 있다면 맡기고 싶을 정도로 더웠다.


아무래도 손에 점퍼를 들고 가는 것은 귀찮아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난다. 눈으로 세수를 한 번 해본다. 우와! 순식간에 5도는 떨어졌다. 이걸로 부족하다. 친구가 눈을 내 등에 넣는다. 우와와와 온도가 5도 더 떨어졌다. 더운 기운이 확 사라졌다. 다시 오를 만 해 졌다. 하하하.



정상에 오르니 주변 시야가 확 트이고 설산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올라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어승생악 블로그를 미리 보지 않아서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눈 덮인 한라산 정상은 밟아보지 않았지만 거의 이 느낌 비슷하지 않을까 혼자 합리화를 해 본다. 그 정도로 여기 어승생악 정상은 구름과 설산의 환상궁합이었다.


이 기분 그대로 어승생악 정상 표지석과 친구랑 사진에 남긴다.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최근 봤던 내 모습 중에 가장 밝다. 환한 웃음이 얼굴 가득이다. 이 웃음을 잊지 말고 2023년을 건강하게 재미있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정상에서 먹는 쌀새우깡이 별미다. 한라봉도 훨씬 달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뭐든지 안 맛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 좋은 기분으로 파카를 눈 위에다 깔고 5분 정도 눈을 감고 누웠다. 하하하 호호호 웃는 웃음소리가 어승생악에서 울려 퍼진다. 이 편안함, 이 여유 있음, 제주 살이의 목적을 찾은 듯하다.



여기 어승생악, 올라오면서 아이들도 참 많이 봤다. 눈 보러 온다고 하면서 아이들 데리고 오면 아이들에게 소중한 눈 선물을 줄 것 같다. 어승생악 그렇게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갔다 오니 이제야 알겠다. 왜 사람들이 어승생악 어승생악 하는지. 그 이유는 30분 만에 쉽게 오를 수 있으며, 올라오는 내내 눈 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거다. 무엇보다, 정상에서의 풍경은 내가 제주에 흠뻑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연과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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