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12월 달력엔 하얀 눈이 내려서 온 산과 나무에 눈꽃이 활짝 핀 사진이 있다. 밥 먹을 때마다 이 사진을 보며 그래 '눈꽃' 실제로 보면 참 예쁘겠다, 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하지만 눈꽃은 사진 속 눈꽃일 뿐 아이 키우는 나에겐 전혀 상관없는 일인 줄만 알았다.
12월 달력 속 눈꽃 사진
태생이 부산인 나는 사실 눈을 제대로 본적이 몇 번 없다. 경기도 안성에 발령이 나서야 수업 중에 함박눈이 펑펑 내릴 때가 가장 인상 깊은 눈 내리는 장면이었다. 덕유산에 눈꽃이 끝내준다던데... 한라산도 겨울에 가면 정말 좋다던데... 겨울 산에 갔다 온 사람들의 한 마디에 너무 부러워 '눈꽃'은 한 번은 제대로 구경하고 싶었다.
부산엔 눈이 안 오니 눈꽃을 보러 가려면 부산에서 덕유산까지 3시간은 가야 한다. 그것도 아이들 데리고... 장모님께 부탁하고 갈 수도 있지만 눈꽃 보러 아이들 부탁하기는 조금 눈치가 보였다. 아니 눈꽃 보러 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3살 4살 아이들 키울 때는 감히 아이들 잘 크는 것 자체가 중요했지 '눈꽃'은 한 마디로 사치였다.
동백꽃과 설산 한라산 by도도쌤
까멜리아힐에서 바라 본 눈 내린 한라산 by도도쌤
제주도에 사는 나, 부산보다 남쪽인데도 자고 일어났더니 저 멀리 한라산 주위에 하얀 눈이 가득하다. 내 입에서 '우와!'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한라산이 제대로 높긴 높구나!', '제주도는 남쪽인데도 생각보다 눈 보기 참 쉽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까멜리아힐 갔다가 눈 내린 한라산을 보며 저기 가면 참 좋겠는데 하는 찰나, 중문에 사는 친구 녀석이 1100 고지 갔다 보낸 설산 사진을 보내준다.
친구가 보내 준 1100고지 눈 내린 풍경 by중문에 사는 친구
'아~부럽다!'
제주에 살아도 친구 내외가 갑자가 부러워졌다. 눈 사진 달랑 몇 장인데 친구 내외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눈 보러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가득 올라왔다. '저기 가면 설산을 실제 볼 수 있단 말이지... 눈 녹기 전에 저 멋진 풍경을 두 눈으로 가득 담아와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다음 날 드디어 아내와 나도 1100 고지 정상에 올랐다.
평일 금요일이라 여유 있게 '1100 고지 습지 둘레길'을 걸을 거란 나의 생각은 정상에 다다르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100 고지 정상 휴게소 주차장은 이미 꽉 찼고, 도로 한쪽에 차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어 주차할 곳 찾기가 어렵겠다 싶다.
1100고지, 눈 내린 풍경을 보러 온 사람과 차들로 북적북적하다. by도도쌤
경찰관 한 분께서 호각까지 불면서 주차 정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모습에 속으로 힘찬 박수를 보냈다. 1100 고지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니 다행히도 주차할 공간이 보인다. 주차하고 내렸더니 어느새 내가 '설산' 한가운데 서 있었다.
눈꽃을 보다. by도도쌤
'차로 30분 만에 왔는데 설산을 이렇게 쉽게 봐도 되는 거라고!'
'두둥! 이게 현실이라고! 눈꽃이 내 눈앞에 바로 있는 게 말이 되냐고!'
올해 첫눈 내린 풍경에 내가 있다는 자체가 신비스러울 정도였다. 12월 달력 속에 있는 눈꽃 풍경에 내가 쏙 들어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사진의 감동이 10이라면 여기 1100 고지에 실제 있으니 그 감동이 100을 넘어서 200백300백 수준까지 다다랐다. 추위를 실제 피부로 느끼며 설산 전체를 눈으로 보며 눈을 뽀드득 밟으니 '아! 겨울 설산이 이렇게 아름다운 거구나!'를 제대로 실감했다.
영실 쪽에 눈이 하얗게 내렸다. 다음에 꼭 도전이다. by도도쌤
"세상에~이런~어쩜 좋아!"
힘겹게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 여성 한 분이 설산을 보자마자 한 마디 하는데 딱 내 맘이다. 폰을 꺼내 사진 찍기 바쁘시다. 친구 내외가 갔던 1100 고지 둘레길을 아내와 나도 이제 걸으러 간다. 어떤 감동이 펼쳐질까 두근두근 거린다. 아쉽게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사진 찍기 좋은 장소는 는 조금 기다려야 한다. 데크길이 좁아서 뒤에서 오는 분들 눈치도 봐야 하고 사진 찍을 타이밍 잡기도 제법 힘들다.
흰머리가 김쪽같다는 친구의 말에 빵 터졌다. 내 사진 중에 제일 잘 나왔다고???ㅋㅋ by아내
"얼른 서봐!"
"찰칵!"
얼른 찍고 나와줘야 한다.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조금 빨리 걸어가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본다. 거기서 여유 있게 설산과 눈꽃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니 한결 낫다. 조금 전 찍은 사진을 아내가 보더니 흡족한 미소를 보낸다. 가족 채팅 창에도 설산 기념사진을 하나 올린다. 이 좋은 풍경을 가족들도 직접 다 같이 와서 봤으면 하는 마음이 제일 크다.
8명 정도 되는 아주머니 일행 분들이 셀카봉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으시는데 그 모습이 참 정겹다. 나모 모르게 편안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면서 한 분께서 눈 내린 데크길을 걸으면서 한 마디 하시는데 바로 내 맘이 이랬던 거다.
"감탄을 얼마나 하면서 걷는 거야!"
1100고지 습지 둘레길에서 만난 풍경 by아내
감탄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사진 속 나의 광대가 하늘 높이 찌르고 있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 아주머니 말씀처럼 눈 내린 한라산 풍경에 흠뻑 취했다. 겨울 제주도의 눈 내린 풍경은 또 다른 제주의 멋이었다. 숲길도 좋았는데 해안 길도 좋았는데 눈 산도 이렇게 좋단 말이란 말인가!
도대체 제주도는 안 좋은 게 뭐가 있다는 말인지... 설산을 보고 제대로 또 한방 먹은 날이었다.
하얀 사슴이 눈 오는 날에 유달 시리 눈에 들어온다. 까마귀의 까만색이 유달리 눈에 쏙 들어오는 눈 속 풍경이다. 눈이 녹아서 후두 두두둑 눈꽃이 내 머리 위로 툭툭 떨어진다. 설산과 눈꽃에 푹 취한 오전 한때였다. 12월 달력 눈꽃도 좋지만 진짜 눈꽃이 최고다. 30분이면 눈을 마음껏 볼 수 있는 한라산이 있다는 게 마냥 좋다. 제주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