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삶에게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에서 인간에 대해 탐구해 보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철학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리즈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천진난만하던 아이도, 온화한 미소를 짓던 여인도, 조금은 긴장한 신혼부부도, 사회적 명성을 이루고 세상에 혁신적인 기여를 한 사람도 이제 세상에는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보고 있는 당신도, 500조 분의 1이라는 극적인 확률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죽을 확률은 100%이다.
오늘은 철학에서 피해 가기 어려운 주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조금 길게...
앞으로 펼쳐질 우주의 장대한 시간에 비해 보면, 우리는 100년도 안 되는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을 살다 간다.
지난 글들에서 이야기했던 자아 실현, 자아 존중, 자아 연민 등의 종국적인 결과는 '자아 소멸'이다.
사람들과 떠들고, 기뻐하고, 낙담하고, 환희에 차고, 슬픔에 싸이던 우리의 모든 순간들은 우리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만약 후손을 남겼다면 나의 유전자 일부는 당분간 대를 이어 더 살아 나가겠지만, 몇백만 년(우주 역사의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인류 자체가 멸종할 가능성이 있다.
운 좋게 몇천만 년 이후까지 인류가 살아남는다 해도 유전자와 외형이 완전히 달라진 미래의 인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아마도 동물 시대로 취급할 것이다.
그 미래 인류가 지구라는 무대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60억 년 뒤에는 태양이 적색거성으로 부풀어 올라 지구를 집어삼킨 후, 그 태양마저 백색왜성으로 쪼그라들며 지구의 흔적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운 좋게 태양계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한다고 해도 10^35년이 지나면 물질을 이루던 양성자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우주는 열적 사멸(heat death) 상태로 진입을 시작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예측이다. 생명은 물론 블랙홀, 행성, 돌멩이 같은 우주의 모든 덩어리 물질이 사라지고, 광자, 중성미자, 전자 같은 입자만이 우주에 희미하게 떠도는 영하 약 270도의 극저온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우주도 죽음을 맞이하는 마당에, 백 년도 못 살고 가는 우리의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살아있을 때의 믿음과 선행이 죽은 후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 줄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브런치북은 과학철학을 표방하기에, 여기서 이를 증명해 낼 방법은 없다. 종교는 증명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빛보다 빠르게 정보가 전달되는 양자 얽힘 현상이라든가, 지금 우주와 다른 물리법칙을 가진 또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다중우주론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또 다른 4차원, 5차원의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아마도 영적 세계일 지도 모른다는 과학적 가설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생명의 점진적 변천 과정 속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인류를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 등은 난제가 될 것이다.
우주가 열적 사멸 상태에 이르면, 물질들이 양자화되어 엄청나게 팽창된 우주 공간 속에서 희박한 확률로 양자요동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양자요동의 터널링 현상으로 또 다른 우주가 다시 시작될 가능성도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100조 년이 걸릴지 100간(10^38)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이렇게 되기만 한다면 다시 한번 지금과 비슷한 물리 조건을 가진 우주가 생기고, 여기에 다시 생명의 씨앗이 되는 원소들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나와 똑같은 유전자 조합을 가진 똑같은 개체가 다시 생겨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100간 년 걸릴지 모르는 우주의 재탄생이 100간 번 발생한다면 가능할까?
불가에서는 이를 억겁의 시간, 아승기겁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다른 차원이나, 우주의 재탄생은 과학자들의 가설일 뿐 실험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저 신앙은 믿는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신앙을 의지 삼아 마음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도 분명 의미가 있다.
반면 신앙을 잠시 접어두고, 우리의 죽음을 직관적으로 한 번 바라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직관적인 죽음의 모습은 100년 가까이 울고 웃고 떠들던 사람이, 1000℃ 이상 고온의 화장터에서, C, H, N, O 성분 상당량은 대기중으로 날아가고, 몇 줌의 인산칼슘 하얀 덩어리가 남아 유골함에 담기는 것이다.
즉, 우리의 뇌가 사라지면서, 우리가 울고 웃던 세상의 모습과 자아는 소멸되는 것.
현재까지 우리의 과학이 밝힐 수 있는 죽음의 모습은 여기까지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의 시간이 아침일지 한밤중일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오싹한 생각이 든다.
'자아를 실현하고, 자아를 존중하고, 자아를 연민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의 결말이 자아 소멸이라니...'
불현듯 공포가 밀려오면서도 허무한 마음이 든다.
죽음을 생각하면 찾아드는 공포와 허무한 마음...
한 번 들여다보자.
먼저, 공포라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 또는 살면서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길 가다가 멧돼지나 곰을 맞닥뜨리면 왜 공포스러운 것일까? 곰이 앞발로 나를 할퀴거나,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먹어서 아픈 경험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경험하게 될까봐 느껴지는 감정이 공포인데, 가만 보자...
죽은 후에는 뇌 기능이 정지되면서, 죽음의 상태를 경험할 수 없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자의식의 소멸로 죽음을 느낄 주체조차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죽은 후에는 죽음을 느낄 수 없다. 경험은 오직 살아있을 때만 느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포의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말기암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사람이라 해도,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까지 죽음을 걱정하고 공포를 느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물론 감정적으로 무척 힘들겠지만).
다만, 조금 서운할 뿐이다. 사람들의 체온과, 신비한 자연과 우주, 변해가는 세상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니.
예정된 죽음 앞에서 인생이 허무한 마음이 드는 것은 특별히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니체, 쇼펜하우어, 까뮈도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책을 쓰곤 했다.
인생 말고 우리 집이나 동네에서 보이는 강아지의 견생은 어떨까? 개팔자가 상팔자. 그들은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심심하면 뛰어놀면서 장난을 치고 지내는 것 같다.
침팬지와 코끼리는 죽은 동료가 더 이상 움직임이 없고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죽음을 추모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생활 역시 강아지와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열심히 식량을 구하고, 먹고, 쉬고, 놀고, 짝짓기 하는 것이 그들의 생활 패턴이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까 개, 침팬지, 코끼리의 생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삶이 의미가 없고 허무하다는 생각은, 삶에 대해서 지나치게 목적론적 의미를 추구하고, 인생에 거창한 의미와 사명을 부여하려 하고, 실체가 불분명한 이상과 윤리를 추구하는데서 올 가능성이 있다.
가장 떠오르는 영미권 속담이 하나 있다.
"The journey, not the destination."
삶은 종착역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
강아지는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먹기 위해 노력하고, 놀고 자는 것이 곧 견생인 것처럼, 사람의 인생 역시 누군가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그리고 유전자 속에 이미 '생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기본 속성이자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태오복음 6장 34절.
"Carpe Diem."
주어진 '현재'에 충실해라.
"無常(무상)"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없다.
성경과 고대 로마와 불가의 서로 다른 가르침이지만, 실체 불분명한 인생의 종국적인 가치를 찾아 헤매는 것보다는, 현재의 삶에 보다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일맥상통해 보인다.
우리는 흔히 좋은 집, 좋은 차, 지위, 체면, 명품 수집, 이런 것들을 성공한 인생으로 여기고 평생을 추구하지만, 현재에 충실한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의를 바꿔, 인간의 삶을 '먹고, 놀고, 쉬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랑하고 관계 맺는 삶',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삶으로 정의해 본다면 어떨까?
혹자들은 너무 동물적 본능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려 한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사회, 특히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목표지향적인 삶에서 한 발자국 내려와 좀 더 인간의 본능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휴일 공원 벤치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앉아 쉬면서 간식을 먹고, 바람을 느끼면서 사람들과 스몰토크를 하거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실용서가 아닌 재미있는 소설책을 한가롭게 읽는 모습,
전통적인 가족 형태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열린 연애,
좋아하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에의 꾸준한 몰입,
이런 사람들을 행복지수가 높은 유럽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물론, 공부가 필요한 젊은 세대에게 무작정 놀기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뭔가 특별하고 거창한 목적이 아닌, 좀 더 본질적인 실제의 삶에 포커스 두고, 시선을 다르게 보자는 것이다.
즉, 좋은 집과 좋은 차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연인을 찾고 유지하기 위해 유용한 하나의 수단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인생은 행복과 거리가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본질적인 삶을 잘 영위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하다는 솔직한 조언이 오히려 내적 동기부여를 줄지 모른다.
기적 같은 확률로 태어나, 이 세상의 모습을 잠깐 보고 듣고 느끼다가 가는 인간의 삶.
마치 우연히 극장에 들렀는데 2시간 동안 감동적인 이야기가 상영되고, 영화가 끝나면 마지막에는 검은 스크린이 나타나는 장면하고 비슷하지 않을까?
축구 경기는 90분 뒤에 마무리되지만 90분 동안 최선을 다해 경기를 즐기던 손흥민 선수의 달리기는 결코 의미 없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의 삶.
살아가면서 직접 느끼는 자연과 음악의 아름다움과, 치킨의 고소함과, 연애의 짜릿함과 슬픔, 인생의 시련과 극복,
이 기회는 극적인 확률로 생겨났으며, 과정 자체가 그 어떤 영화보다 감동적인 리얼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에필로그.
우주와 우리의 삶에도 탄생이 있으면 소멸이 있는 것처럼, 브런치북도 아쉽지만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철학은 결국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서는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문학, 미시물리학, 화학, 생물학, 진화심리학 등 다양한 과학의 언어를 빌려 우리가 누구인지를 탐구해 보고자 했습니다.
태고의 우주 탄생에서부터 생명의 변천, 인류와 유전자, 사람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나'라는 존재를 여러 방면에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특별히 거창한 사명과 이상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금 더 따뜻하고 관용적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여러분께도 아무쪼록 작은 위로와 고찰의 시간이 되었기를 바라 봅니다.
한정된 연재 횟수 안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환경에 적합한 개체만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뿐만 아니라, 번식에 유리한 개체가 선택된다는 '성 선택' 이론. 그에 따른 남녀의 사랑과 권력과 갈등. 유전자의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인 '번식' 부분을 다루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특성이 유전자뿐만 아니라 환경과 문화에 의해서도 어떻게 형성되는지
✔️유전적 특성이 개인을 넘어 다양한 사회 제도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미래 AI와의 로봇의 시대에서 인간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
이런 주제들은 다음 기회가 있을 때 더욱 풍성한 이야기로 다뤄보고자 합니다.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허락해 주신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구글 Gemini에게도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자료 검색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글을 쓰는 데 깊은 영감을 주신 위대한 사람들께 가장 중요한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비록 저를 모르시겠지만, 갈릴레이, 르메트르, 찰스 다윈, 애드윈 허블, 칼 세이건, 유발 하라리, 리처드 도킨스, 최재천 교수님, 김상욱 교수님, 김범준 교수님, 서은국 교수님, 이정모 관장님, 지웅배 박사님께 깊은 존경을 표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를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 동료 작가 여러분께 깊은 감사 말씀 올립니다.
-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
윤하. 사건의 지평선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