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존감, 어디서부터 오는가.

500조분의 1의 기적, 과학적인 존귀함

by 공상과학철학자
본 브런치북은 과학적인 시선으로 인간에 대해 탐구해 보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철학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리즈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자아 존중감. 그전에 먼저 늑대 이야기다.


Wolf.

식량을 함께 확보하고, 시니어들은 어린 새끼를 돌보며 지혜를 전파하고, 새끼들끼리는 어울려 놀며 사회의 기술과 규칙을 배우는 늑대의 협력 세계는, 인간 사회(100 년 전의)와 무척 닮아있다.


인간과 닮은 것은 협력뿐만이 아니다.

서열 경쟁을 벌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높은 서열에 오르면 먹이를 먼저 먹을 수 있기도 하지만, 무리 안에서 독점적인 짝짓기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큘라 백작, 엑스맨의 울버린 등 늑대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늑대가 사람과 닮아있다는 무의식에서 나온 산물일 수도.)


그러나 알파의 자리가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먹이를 나중에 먹는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번식의 본능 즉, 짝짓기 본능은 특히 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전자가 아무 때나 함부로 덤비는 것도 아니다. 도전자는 덤비기 전에 반드시 두 가지를 따진다.

① 타도 대상인 알파수컷의 신체, 건강 상태

② 나(도전자)의 신체, 건강 상태

이를 따져 승산을 저울질한 후, 이길 수 있다고 판단될 때 도전한다.


여기서 ②번을 주목해 보자. 도전자 늑대 자신의 신체, 건강 상태는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한다.

실제보다 스스로를 높게 평가했다가는 도전의 결과가 참혹해질 것이며,

실제보다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게 되면 도전의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를 있는 그 상태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알파에게 도전할지 말지에 대한 보다 정확한 답을 내려준다.


그렇다면 이 원리를 사람에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 현대 사회에 적용해 볼 수는 없을까?

①은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

②는 현재 나의 수준 - 즉, '자아'

이런 식으로 바꿔 본다면 어떨까?


이렇게 된다면, ②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자아 인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파악된 내가 스스로 만족스러웠을 때 느껴지는 만족감은 '높은 자존감',

불만족스러웠을 때 느껴지는 화남이나 슬픔은 '낮은 자존감'으로 치환될 수 있다.


즉, '자존감'이라는 것은 높은 이성과 감정을 컨트롤해서 얻어지는 고차원적인 감각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파악하고 감정을 느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조절하는, 심리적 진화의 메커니즘으로도 볼 수 있다.

바로, 미국의 현대 심리학자 마크 리어리(Mark Leary, 듀크대학 교수)가 제시한 '사회 계기판' 판독의 감정이 자존감이라는 이론이다.


사람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초등학생 1학년인 철수는 자기가 항상 최고인 줄 안다. 거울을 보면 최고 미남에, 머리도 좋고 운동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3학년쯤 되어 학교에서 시험을 보고 체육시합을 하는 순간...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객관적 상태를 과대평가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형태이다. 하지만 이 만족감은 무척 깨지기 쉽고 취약하다.


서른 살 영희 씨는 연봉 7천만 원을 받고 대기업 직장을 다닌다. 164cm의 키, 명문대학교 졸업, 뛰어난 외국어 실력, 특출 나게 예쁘지는 않지만 거부감 없는 포근한 얼굴, 서글서글한 사회성... 운동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친다.

하지만 TV 속에 나오는 탑 배우들과, 동갑인 회장 딸이 출근해 본부장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보면, 심한 열등감을 느낀다.


마흔 살 재훈 씨는 방 2개 반지하 월세에서 노부모, 자녀 셋과 함께 지낸다. 폐지를 줍고, 끼니와 전기요금이 걱정이지만 '그래... 생활환경과 몸은 고통스럽지만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상태지.'라고 느낀다.


이렇듯,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만족감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도,

만족감의 기준이 너무 쉬운 것도,

철수와 영희와 재훈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진정한 자존감을 찾는 것은 어떤 것일까?



철수는, 도전하려는 늑대처럼, 사회 속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수용하고,

영희씨는, 자기 만족감의 기준을 합리적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사회의 평균적 풍요와 경쟁 스트레스를 감안한다면, 자기 만족감의 기준은 살짝 낮춰주는 것이 현대 한국인들의 행복감에 대체로 유리하다.

물론 재훈 씨에겐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열망이 필요하다.


인간의 자존감이 '사회적 지위의 계기판을 읽고 느끼는 감정'이라는 이론은 우리에게 다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오랫동안 사회를 이루며 함께 수렵 채집 생활을 이어온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면, 흠잡기 어려운 타당한 이론이 된다.


이것을 자존감으로 봤을 때,

자아를 정확히 인식하고,

만족감의 기준을 합리적으로 세우는 것은,

우리의 자존감을 세우면서, 마음의 행복과 도전의 균형을 이루는 좋은 지침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늑대와 원시인류는 몇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우주 원소 별의 조각 중, 세상의 환경에 적응하기에 최적화된 특성이 유전자로 이어지고 이어져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


내 몸은 40조 개의 미생물이 살아가는 세상이자, 30조 개의 세포, 70해(7*10^21) 개의 원자를 품고 있는 또 다른 우주라는 사실.


아빠가 평생 동안 생산하는 1조 개의 정자와, 엄마가 만드는 500 개 난자 중, 500조분의 1이라는 극적인 확률로 잉태되어 탄생한 기적의 존재가 나라는 사실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체로도 이토록 충분히 존귀한 존재임을 말이다...


단단한 근원적 자존감의 바탕 위에서,

사회적 자존감의 합리적인 조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나의 소중함을 스스로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존감이 참 단단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굳이 누가 하건 말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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