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apore] 번개뷰와 함께 하는 식사

Bread Street Kitchen by Gordon Ramsay

by JULIE K

여행을 가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날의 일기는 꼭 기록한다. 당시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남겨놓기 위해서이다.


더불어 잊지 않고 하는 것이 바로 정산이다. 카드 한 장이면 모든 여행이 가능한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통화(通貨)로 계산하고 지폐와 동전을 세는 것이 꽤나 즐겁다.


저마다 다른 모양의 화폐를 구경하는 것 역시 여행의 일부였다.


기억하는 가장 예쁘고 마음에 들었던 것은 스위스 프랑(franc)이다. 그림과 색감도 화려하고 조금 더 플라스틱에 가까운 질감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그 나라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국가 중 하나로, 화폐 역시 고급스럽게 느껴진 것은 나만의 생각이다.


유일한 사치
Gordon Ramsay


어젯밤, 보통처럼 하루를 기록하고 정산하며 식 예산이 엄청 많이 남았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돈을 딱히 다른 곳에 쓸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쇼핑은 할 수 없을 거라고 직감한 것일까..


고스란히 남겨가서 재환전해봐야 손해이니 어디에 쓸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지나가면서 우연히 본, 큰 규모의 새로 생긴 '고든램지' 레스토랑이 떠올랐다.


한국에서라면 딱히 갈 일이 없을 고급레스토랑이다. 예전 영국에서 지낼 때부터 이미 유명했던 그의 음식이 궁금해졌다.


그래, 우리를 위해 한 가지쯤은 투자를 하자!

배고픈 너의 뒷모습


오후 3시.


다급했던 '레고'사건을 급히 해결하고 레스토랑에 서둘러 온 이유다. 다행히 예약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했다.


아이들이 요즘 부쩍 빠져 있는 메뉴가 바로 햄버거다.


이번엔 딸아이가 맛있게 많이 먹어주길 바라며 설레는 마음으로 입장했다. 밖이 훤히 보이는 창가자리로 안내받았다.


주말 오후지만 식사시간이 지나서일까? 내부가 한적해서 좋았다. 무얼 먹을까.. 여행 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음식의 종류가 정말 많았다. 시그니처 메뉴인 '비프 웰링턴'이 먹고 싶었지만 입 짧은 꼬맹이와 위통이 작아서 슬픈 아줌마에게는 헤비 한 음식이었다. 소박하게 피시 앤 칩스와 햄버거를 주문하기로 한다.


문제는 어떤 것을 키즈메뉴로 고르느냐였다. 크기가 작아지기 때문이다.


영국 하면 피시 앤 칩스지!


햄버거는 어제도 먹었으니 오늘은 생선요리로 결정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머지않아 식전빵이 나왔다.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다.


제일 좋아하는 식전빵은 겉이 너무 딱딱해서 자칫하면 이가 부러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맛있으니까 열심히 먹어본다. 아이도 씹기 힘들어했지만 맛있다고 잘 먹어 주었다.


다 먹으면 메인 메뉴를 먹지 못하니 조금씩 맛만 보고 기다렸다.

우리에겐 한 끼



창밖에 저 먼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비라도 시원하게 내려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멀리서 빛이 번쩍 하고 번개가 쳤다.


"어머, 저기 좀 봐! 번개가 치고 있어."


출발하기 전 온통 비구름이 떠 있던 일기예보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비행기 안에서도 착륙직전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번개축제를 구경했었지..


일기예보가 완벽하게 틀린 것은 아니었구나.


이제 본격적으로 가 내리는 건가? 왠지 모를 짜릿함이 느껴졌다. 이미 싱가포르의 아름다운 하늘을 실컷 봤기에 이젠 비가 내려도 더 이상 상관없었다. 리창 너머로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곳이 새삼 안락하게 느껴진다.


딸아이 역시 계속해서 번쩍이는 번개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예전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자동차여행을 한 적이 있다.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 만나는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키 웨스트로 이동하던 중 갑작스럽게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은 시간에 엄청난 양의 비로 인해 순식간에 바퀴가 잠길 정도로 물이 차올랐다. 와이퍼를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칫하면 침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두렵고 무서웠지만 앞뒤로 함께 달리는 차들에 의지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서행하며 힘겹게 그곳을 빠져나와 하이웨이에 오르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고, 아름다운 구름이 멋진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치 다른 세계로 관통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거세게 내리치는 폭우구간을 지나고 한숨 돌리려는데 눈앞에 보이는 먼 하늘에서 느닷없이 번개가 쾅! 하고 내리 꽂히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내 앞에는 달리는 차가 한 대도 없었고, 먹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빛줄기에 도로가 황홀한 오렌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 위로 한번 더 커다란 번개가 쳤다.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경이롭고 값진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내리치는 번개를 보고 있자니 잠시잠깐 옛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기대하던 음식이 나왔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번 사이로 육즙 가득 두툼한 패티와 신선한 야채가 있었다. 작고 귀여운 햄버거가 먹음직스럽게 보였는지 꼬맹이도 함박웃음을 짓는다.


내 앞에 놓인 접시에는 가지런히 정렬된 감자튀김 위로 엄청나게 큰 생선튀김이 올려져 있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 바삭한 튀김 사이에 두툼한 생선살이 한가득이다. 함께 나온 소스와 잘 어우러진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알찬 감자튀김이 담백하고 맛있었지만 플레이팅에만 신경을 써서인지 뜨거운 생선튀김 아래에서 금세 눅눅해졌다.


튀김옷도 코팅된 듯 바삭지만, 너무 얇서 그 사이로 생선살이 흘러나왔다. 겉과 속을 따로따로 먹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문득 브라이튼 해변가에 있는 피시 앤 칩스 식당이 생각났다. 가격도 저렴하고 튀김옷과 잘 어우러진 생선살.. 무엇보다 감자튀김이 일품이었던..


여행 다니면서 향신료가 강한 음식들을 제외하고는 타박하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어마무시한 금액을 지불하고 유명한 셰프의 요리를 기대하고 온 터라 자연스레 본전이 생각날 수밖에!!


크게 한입 베어 물던 꼬맹이는 햄버거가 먹기 불편했는지 패티를 쏙 빼고 야채만 고이 담긴 야채버거를 만들어서 먹는다. 친절하게 고기를 썰어 줬는데 끝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르는 족족 산산조각이 나버린 피시 앤 칩스는 먹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대체 왜! 풍미 가득한 단백질 고기는 쏙 빼고 먹는 것인가..!


단전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유난히 이번여행에서 잘 먹지 못한 녀석은 살이 쏙쏙 빠지고 있었다. 어제저녁에도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시켜 줬는데 맵다며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녀석이 남긴 고기는 내 몫이 되었다. 본전을 생각해서 끝까지 먹어보려 했으나 점점 차오르는 배부름에 포크를 내려놔야만 했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 불편하다.


역시나 사치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어제 이 시간쯤, 맥도널드에서 치즈버거를 배불리 먹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며 거리의 맛집들을 미련 없이 지나쳐갔던 것이 생각났다.


인생은 참..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번 뒤집는 것으로 상황이 이렇게 달라지니 말이다. 알 수 없으니 재미있는 것이겠지..


햄버거 하나에 인생까지 논하게 될 줄이야!

keyword
이전 10화[Singapore] 쇼핑은 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