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지도를 켰을때, 커다랗게 'Old Hill Street Police Station'라고 쓰여있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건물 외관이 독특해서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렇게 암묵적으로 다음 목적지는 정해졌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떠나왔다고는 했지만 아이의 컨디션에 맞춰서 부지런히 코앞에 다가올 스케줄을 계속 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애타게 찾는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이곳을 지나가게 된다.
요즘 떠오르는 새로운 사진 맛집인 핫플레이스도 가고 호텔도 가고.. 나에게는 너무나 좋은 것이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공원을 빠져나가본다.
좁디좁은 계단을 한참을 내려가자 드디어 큰길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순간 이쪽에서 올라가려 했다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천만다행이다. 우리가 올라온 곳보다 훨씬 가파른 언덕이었으니..
공원을 빠져나오자 바로 앞에 경찰서가 있었다. 알록달록 예쁜 색의 창문으로 채워진 건물.. '무지개 경찰서'라고 불리는 이유다. 신호에 맞춰서 차와 사람이 멈춘 순간 찍은 사진이 유명한 곳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일단 길을 건너 본다.
큰길을 한 번 더 건너야지만 정확하게 건물을 정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보는 것도 아름답구나' 하고 만족하기로 한다. 열정이 식지 않는 엄마를 부지런히 따라오느라 지쳐버린 아이와 함께 돌아갈 곳이 있기에..
지나가는 길에 기념사진
뜻밖의 장소 Clarke Quay
경찰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뒤를 돌아본 순간 황홀한 노을에 물들어 가는 '클락키'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까지는 미처 지도에서 확인하지 못했었다.
싱가포르에 올 때마다 빼먹지 않고 들리는 곳이었다. 이번엔 생각조차 못했는데 선물처럼 나타난 것이다.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점보시푸드 레스토랑'이 저 멀리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들과 여행 왔을 때, 칠리크랩을 맛 보여 주고 싶어서 예약하고 왔었다. 잔뜩 기대하며 한 입 맛본 녀석은 생각보다 맵다며 볶음밥만 먹었다. 이렇게 매웠었나? 입맛이 변한 내게도 은근히 매운맛이었다. 아까워서 배가 터지기 전까지 그 많은 양의 칠리크랩을 꿋꿋이 다 먹었었다.
우리의 매콤했던 추억
겁이 많은 나는 한 번을 타지 못했던 익스트림 스윙도 그 자리에 있었다. 반가운 나머지 딸에게 호들갑을 떨며 얘기했다.
녀석의 귀에 꽂힐 리 없는 혼자만의 수다..
잠시 쓸쓸해진 순간이다. 아이와 여행하는 것은 큰 행복이지만, 가끔씩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사무치게 외로웠다.
시간도 남았고 가있을 곳도 마땅치 않으니구경도 할 겸 클락키 근처에 있는 MRT역으로 가기로 했다. 여행이 끝나가면 늘 그렇듯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렇기에 남은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해서 조금이라도 더 둘러보고 싶은 것이다.
구름이 마리나 베이 샌즈에 걸려서 장관을 연출하고, 반대편으로는 저무는 석양의 빛이 건물에 반사되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풍경에 이끌려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알록달록 레스토랑들이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황금빛 야경을 보며 시원한 맥주를 마시던 때를 회상해 본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자유로웠구나. 고이 접어 두었던 기억 저편에서, 지나가던 외국인에게 길을 물어 사테거리까지 함께 걸어갔던 것이 생각났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테 조차 먹지 못했구나. 몇 번 시도를 했지만 낯선 음식에 철벽이었던 녀석은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
변하지 않고 옛 모습을 간직해 오던 이곳도 지금은 조금씩 새 단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공사로 길이 막혀서 MRT역까지 조금 돌아가야 했다.
"엄마! 여기 소주가 왜 있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니? 쓸데없이 기가 막히게 눈썰미가 좋다. 대체 나보다 작은 녀석이 2층에 있는 걸 어떻게 봤을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록병을 발견하고 녀석은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낯선 곳에서 한글을 발견해서인지.. 아니면 어차피 돌아가게 된 거 포기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다.
말로만 길을 설명했었는데 딸과 함께 지도를 보며 길을 찾기 시작하길 잘한 거 같다. 어느 만큼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녀석도 마음이 편해진 거 같다.
여전한 거리, 새로 생긴 추억
거리를 구경하며 길을 걷던 중 어디서 많이 본 자판기가 눈에 확 들어왔다.
생과일 오렌지를 직접 착즙 해서 파는 'IJOOZ' 자판기였다. 하루에 한 번씩 꼭 마시라고 할 정도로 칭찬일색이어서 궁금했는데, 마침 필요한 시점에 딱 만난 것이다.
종일 더위와 싸우며 걸어야 했던 딸아이에게 상큼한 비타민은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시켜 줄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차근차근 주스 한 잔을 뽑아 본다. 안에서 오렌지가 기계에 갈리는 소리가 들리자 딸아이도 눈을 떼지 않고 신기하게 바라본다.두 번째는 딸이 직접 뽑았다.
드디어 나온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두 눈이 번쩍 뜨이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막혀있던 혈관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새콤달콤한 주스가 입맛에 착 달라붙는다. 이래서 다들 이 자판기를 발견하면 꼭 마셔봐야 한다고 했구나..
시원하게 잘 마시던 꼬맹이는 너무 셔서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절반 정도 마시고 내려놨다. 그 덕에 내 뱃속엔 상큼한 오렌지가 한가득이다.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보충한 덕에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인생 최고의 오렌지주스
다시 돌아가야 하는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해가 저물어 가면서도 마지막까지 하늘은 사진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곳에 벤치가 있었더라면 분명 한참을 앉아 있었을 것이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나의 감성을 깨는 건 우리 꼬맹이 몫이다.
너도 참.. 하필 여행에 진심인 엄마를 만나서 고생이 많구나..
온갖 투정을 부리면서도 묵묵히 따라와 준 녀석이다.
소소하게 싸우긴 했지만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이번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다음에 또 여행 갈까?" 하고 딸에게 물었다.
"아니! 절대로! 두 번 다시 엄마랑 여행 안 갈 거야!"
그간 더위를 견디며 걸어 다녔던 것이 많이 힘들었는지 녀석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 우리 한 10년 뒤쯤 다시 생각해 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
10년은 무슨.. 다녀온 지 1년도 안된 요즘 딸아이는 싱가포르에서 한 달은 여행하고 온 마냥 그곳을 추억하고, 다시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