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apore]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Jewel Changi

by JULIE K

호텔에서 캐리어를 찾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마지막은 언제나 가장 아쉬운 순간에 찾아온다. 이제 조금 이곳에 적응해 가고 있던 딸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우리가 타고 갈 항공사 앞에 정확히 세워 주신 택시기사가 작은 캐리어를 들어 보시더니 왜 이렇게 가볍냐며 놀라셨다. 늘어날 짐을 대비해 캐리어 두 개를 가지고 왔는데 옷가지들을 압축하고, 쇼핑한 것이 없으니 비어 있을 수밖에.. 하하!


딸의 인형이 들어 있다고 멋쩍게 웃으며 얘기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우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 먼저 해야 했다. 아니다. 정확히는 신나게 놀아 볼 준비였다. 짧은 바지와 슬리퍼 대신 긴바지를 입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얼리체크인을 마쳤다.


지금 딸아이의 발걸음은 번개보다 빠르다.


배고픈 녀석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자연스레 눈앞에 보이는 쌀국수집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가면 맛있는 식당이 엄청 많은데, 거기 가서 먹을까?"


하고 급히 회유해 봤지만 이미 쌀국수에 꽂힌 녀석에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새우국수, 송파바쿠테, 티옹바루 베이커리, 라우파삿 사테거리, 점보씨푸드 등 맛집이 넘쳐나지만 한 가지도 먹을 수 없었다. 행만 오면 낯선 음식을 경계하는 녀석이다.


그렇기에 지금 보이는 쌀국수가 유난히 반가울 수도 있겠다. 아이가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먹기 힘들다는 고수까지 척척 걸쳐서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절로 배가 부른다. 렇게 잘 먹는 아이인데.. 그동안 먹는 거로 고생했을 녀석이 안쓰러웠다.


어쩌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 앉아서 정신없이 먹고 나오는 것보다, 한적한 이곳에서 쌀국수 한 그릇 뚝딱 해치운 녀석에겐 바로 여기가 맛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쌀국수 한 그릇, 행복



빛의 속도로 걸어가는 딸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녀석이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아껴두었던 에너지를 대방출하는 중이다. 갖고 있는 체력을 다 써버린 나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공항이 이렇게 컸었나?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무빙워크를 지나고 또 지나치고 몸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맛있게 퍼져오는 음식냄새가 먼저 후각을 깨운다.


아.. 여기 맛집이 정말 많은데.. 이미 식사를 마쳤기에 먹을 수 없는 음식일 뿐이다. 아쉽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기에 서둘러 매장 안내도를 살펴본다.


이지링크 카드에 남은 잔액을 털어내는 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다.


중간간 너무나도 눈에 띄는 거대한 폭포를 구경하며 열심히 길을 찾아 편의점에 도착했다.


여행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가지고 있는 동전과 지폐를 공항에서 모두 털어낼 때면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우선 우리가 갖고 있는 이지링크 카드에 있는 잔액을 먼저 털어내기로 했다.


둘이 합쳐서 S$9.80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계산을 해본다. 탑승시간까지 한참 남았기에 우선 생수 2개를 집어 들고 진열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초콜릿과자 두 개를 사면 모두 합쳐서 S$10.00

갖고 있던 동전 20센트도 함께 처리할 수 있는 기회다. 완벽하게 미션을 처리한 기분은 정말 원했다. 이제 남은 돈을 탕진하러 출발해 본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지금 나는 가장 행복한 Flex를 하는 중이다.

스쳐지나가며 본 폭포



다음 코스는 딸이 계속 노래 불렀던 캐노피 파크에 있는 바운싱 네트이다. 아직까지 뛰어노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녀석에게 딱 맞는 곳이다. 재빠르게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입장권을 구매했다.


오후 10시까지만 운영을 해서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핼러윈을 맞이한 온갖 장식들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주고 싶었지만 녀석은 오로지 앞만 보며 불도저처럼 걸어갔다. 거두절미하고 우리의 목표지점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티켓 확인을 받고 소지품과 가방을 맡긴 뒤 입장했다. 들어가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녀석은 신나게 뛰어다닌다. 반면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고 있던 나는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그냥 그물이 아니었기에 걷는 족족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흔들거렸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뛰고 있어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저 그들이 뛰는 대로 내 몸뚱이도 사정없이 튕겨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왕년엔 방방이 타러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뛰어놀았는데, 세월이 야속한 순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국에 들어온 꼬맹이는 최선을 다해서 기쁨을 누리는 중이다. 겁이 없는 녀석은 굽이굽이 난 길을 따라 잘도 뛰어갔다. 거침없이 질주하더니 단숨에 정상을 찍었다.


다행히 이곳엔 사람이 없었고 작은 구멍으로 아래층까지 이어진 미끄럼틀만 있을 뿐이다. 한숨 돌리며 쉬는 동안 녀석은 몇 번이고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갔다가 걸어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혼자서만 타는 것이 재미없었는지 나도 미끄럼틀을 타보라고 재차 권유했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니, 사실은 무서워서 두려웠지만 외롭게 놀고 있는 녀석을 위해 큰 용기를 내어 앉았다.

너에게는 여기가 지상낙원


아래로 이어지는 좁다란 그물을 바라보는데 경사가 꽤 있어 보였다. 쉽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순간 중심을 잃어 미끄러져 내려갔다. 놀라서 잡은 그물에 쓸려서 손바닥이 빨갛게 올라왔다. 하.. 나이 먹은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퇴장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김에 입구 쪽으로 돌아가서 놀기로 했다. 넓은 공간에 띄엄띄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잠시 쉬어 본다.


여전히 쌩쌩한 녀석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쁘다. 바로 옆에 또래 여자아이가 놀고 있었는데 함께 온 아빠가 온몸으로 놀아 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남편이 그리워졌다. 석도 지금은 함께 놀아 줄 아빠가 보고 싶.. 아, 아니다.. 그냥 뛰어노느라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드디어! 시간이 다 되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어두운 동굴에 갇혀있다가 바깥세상으로 나오면 이런 기분이 들까? 유독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고 눈이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해방된 느낌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짐을 찾고 발을 내딛는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땅 위를 걷는데 내 몸이 계속해서 춤을 추는 기분이랄까..? 하하!


지치지 않는 꼬맹이는 바로 옆에 있는 미끄럼틀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무한 반복했다. 애들은 왜 이렇게 미끄럼틀을 좋아하는 걸까? 그동안 힘들다고 그렇게 찡찡대더니 어디서 힘이 나오는 건지.. 역시 아이들에겐 놀이터만 한 곳이 없나 보다.

끝나기 전에 잠깐 본 레이저쇼


바로 그때, 오늘의 마지막 레이저쇼를 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쥬얼창이의 명물인 대형폭포를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녀석에게 레이저쇼를 보러 가자고 했다. 하지만 태엽이 감겨서 앞으로만 직진하는 장난감처럼 내 앞을 쌩~ 하고 지나쳐서 미끄럼틀 타기를 반복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있는 녀석이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꼭 보고 싶었다.


계속해서 놀고 있는 녀석을 확인한 후 바로 옆에 있는 전망대로 갔다. 엄마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녀석이 재빠르게 따라 나왔다. 이미 레이저쇼는 시작했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위로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뒤로 지나가는 트램이 멋스럽게 느껴진다. 근데 왜 롯데월드가 떠올랐을까? 잠시였지만 놀이공원에 온 기분이었다.


쇼가 끝나자 정확히 폭포도 가동을 멈췄다.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어느새 식당불도 다 꺼지고 붐비던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더 이상 할게 없어진 우리도 천천히 게이트를 향해 이동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공항은 늘 기다림과 지루함의 상징이었는데, 이렇게 정신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다니.. 마지막까지 시간을 알차게 써서 만족감은 올라갔지만 에너지는 점점 더 고갈되고 있었다.


오후 11시 40분.


출발시간까지 약 3시간이 남았다. 진정한 인고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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