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으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행복하지만, 반대 상황이면 헤쳐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날씨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날씨였다.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은 장소에서는 파란 하늘이 쨍쨍하게 펼쳐진 덕분에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조금 걸어야 하는 곳에서는 거짓말처럼 구름이 강렬한 태양을 가려줬다. 우중충하게 흐린 날이 아닌, 눈에 보이는 곳은 환하고 밝아서 기분이 가라앉지 않게 해 줬다.예보되었던 장대비는 우리가 실내에 있을 때 시원하게 내렸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오늘은 걷기에 최적의 날씨이기에 장거리도 충분히 도전해 볼만하다. 현지 상황이 허락한다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보타닉가든'에 꼭 가보기로 했었다. 문제는 시간이다. 짧은 시간 내에 둘러보고 올 거리와 규모가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또 과감하게 포기해야 했다.
시간이 남는데 어디를 가지..
역시 무작정 떠나 온 여행은 나와 맞지 않는다. 미리 정해놓은 계획대로 움직이면 편한 것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무얼 할지 정하고 장소를 골라야 하는 번거로움이 크다.
여행만 오면 결코 발을 땅에 딛지 않는 녀석이었다. 늘 아빠 등에 업혀서 다녔기에 다음 일정을 묻는 것이 조심스럽다.
싱가포르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하는 '센토사섬'을 아예 배제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걷다가 녀석이 힘들어하면 언제든지 호텔로 돌아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만 골라서 다녔다.
그러고 보면 보타닉가든 역시 말도 안 되는 장소인 셈이다. 어째 쉽게 포기가 된다 했다. 어디를 갈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가까운 공원에 가기로 했다.
비싼 탄수화물로 배를 두둑이 채운 딸이 마지막 장소란 말에 마음을 열어 주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시간을 그냥 보낼 수 없다.
가보자고~~!!
하늘에 무슨 일이..
마지막으로 탄 2층버스에서 본 하늘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거대한 구름 이불이 파란 하늘을 점점 덮고 있었다. 지금까지 운 좋게 비 한 방울 맞지 않았는데 설마 지금 비가 내리는 건 아니겠지? 캐리어에 과감하게 두고 온 우산이 생각났다. 아쉽지만 우산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창밖을 구경해 본다.
공사 중인 포토스폿 Fort cannning tree tunnel
온통 초록으로 덮인 터널 위로 보이는 하늘, 신비로운 느낌에 반해서 궁금했었던 이번 행선지..
안타깝게도 공사 중이다.
유일(唯一)하게 꼭 가보고 싶어서 일정에 넣은 곳인데, 출발 이틀 전에 비보를 접하고 의욕을 잃게 만든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기에 최적인 날씨는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다주었다.
싱가포르 거리를 거닐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숲을 연상케 하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빌딩 사이사이 심지어 건물 안에서도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예전에 아들과 함께 왔을 때 우연히 식물들로 뒤덮인 건물을 보고 참 신기하다 했었는데, 이번에 오니 도시 전체가 식물과 공존하고 있었다. 독특한 풍경은 어느새 복잡한 도심에서 느끼는 나만의 힐링스폿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걷는 길 역시 한적하고 좋았다. 유난히 이번 여행은 가는 곳마다 여유로워서 이 또한 마음의 평정심을 찾는데 큰 도움을 줬다.
아무도 없는 언덕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빌딩에 반사되는 태양의 빛이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해 줬다. 넋 놓고 바라보며 걷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 다다르자 숲냄새가 짙게 났다. 그때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비가 내리는 건가? 우산이 없었기에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야 하나 잠시잠깐 망설였다.
그런데 다시 돌아가면 어디로 가야 하지? 애초에 계획이 없던 여행이기에 플랜 B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 뭐 있나? 비도 좀 맞고 다니는 것이 여행이지. 혼자였다면 망설일 필요도 없이 직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책이 없기 때문에 비가 쏟아진다면 저 멀리 보이는 건물로 뛰어가서 대피하기로 했다.
길 건너 공원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포트캐닝 트리터널'을 보러 왔다가 허탕 친 사람들이었다. 사전에 인터넷에서 공사 중인 모습을 보고 왔지만 호기심에 가까이 가본다.
녹색 천으로 뒤덮인 구조물이 더 높게 올라와 있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속상할 줄 알았는데 알 수 없는 쾌감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미련을 갖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하는 모든 공사들은 우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끝난다. 새 단장을 하고 아무 일 없었단 듯이 관광객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이 즐겁게 관광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공사 중인 사진을 찍은 것은 내가 무이(無二) 할 테니까..
트리터널 역시 공사 중
마침 쏟아질 것 같은 빗방울도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공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힘차게 올라가 본다.
가벼운 계단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숨이 가쁘다.예상치 못한 운동을 하고 정상에 오르자 생뚱맞게 미술관이 나왔다.걸려있는 현수막을 보니 도자기와 관련된 전시를 하고 있는 듯했다.
여행지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나에게 쉼터 같은 존재이다. 특히나 무료로 개방하는 곳은 부담도 없고 꽉 찬 전시관을 둘러보는 것이 꽤나 재밌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언덕을 오르느라 에너지가 반이나 줄어든 딸아이의 분위기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이라 공원 곳곳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가까운 곳에는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도 있어 시간이 된다면 가보려 했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걸어서 힘들어하는 꼬맹이를 보니, 이런 것들이 녀석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여주고 싶은 게 무궁무진하지만아이에게는 엄마의 욕심일 뿐이다.
눈치를 단단히 챙긴 나는 딸에게 요 앞에 길을 따라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오니까 거기까지 가서 호텔로 돌아가자고 설명해 주었다.
비가 오려다가 안 온 것은 하늘이 주신 축복이지만, 그와 함께 올라간 습도는 아이를 더 지치게 만들었을 것이다.이미 많이 걸어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무조건 직진만이 살 길이다.
좁은 길을 따라 우거진 커다란 나무들이 인상 깊었다. 굽이굽이 난 아무도 없는 길을 계속 걷다 보니 문득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흐린 날씨도 한몫했을 것이다.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는 길은 초행자에겐 때론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저마다 다르게 보이는 풍경
시야가 탁 트인 넓은 공원을 생각하고 왔는데 생각과 다른 환경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좁다란 길을 찾고 찾으며 이 공원을 충분히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걷는 것이 힘든 딸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일 뿐이다.
바로 근처에 있는 유명한 빵집의 크로와상도 녀석의 환심을 사지는 못했다.
별수 없이 지도를 켜고 도심으로 빠져나가는 최단거리를 찾았다. 머지않은 곳에 큰길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가던 중 갈래길을 만났다. 내리막길로 가면 바로 출구가 나온다.
본능적으로 나는 오르막길로 올라갔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하지만 언덕을 올라간 순간 내게는 또 다른 유니버스가 시작되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에만 급급해서 정신없는 와중에, 빌딩숲을 배경으로 흔들의자에 앉아서 한가로이 책을 읽는 사람을 보는 순간 나의 시간은 잠시 멈추었다.
시끄럽게 달리는 자동차 소리..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더는 걷기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딸아이의 목소리까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경관이 너무나도 평화롭게 보일 뿐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갓 지은 밥 냄새가 풍겨오면, 밖에서 신나게 뛰놀던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바빴던 하루를 마감하는 평범한 일상이다.
여행자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기에 결코 느낄 수 없는 하루 일과의 모습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꼈다.
눈길을 사로 잡은 풍경
"엄마아~~~~~~~~!!"
나를 부르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앙칼지게 들려오자 나의 유니버스는 끝이 났다. 씩씩거린 채 차소리가 나는 쪽을 가리키며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