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난이도 최상
하루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
매일같이 아침에 눈뜨자마자 생각나는 것. 최대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고 어떨 땐 결정장애가 오기도 하는 어렵고 까다롭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나는 식사시간에 진심이다.
어릴 때부터 편식은 해왔지만 소식하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고 있으면 세상 모든 고민들이 사라지고 행복했다.
남편은 그런 내 성격을 적극 반영해서 연애시절 싸우고 나면 항상 맛있는 음식을 사줬었다. 풍미 가득한 음식들을 한가득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 보면 왜 화가 났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먹는 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오늘 뭘 먹지?' 하는 똑같은 고민에도 즐겁게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소소한 즐거움은 어느 순간 괴로움으로 변질됐다.
나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집에서 양육하고 있는 웬수 같은 자식들이다.
어렵고 복잡한 육아 난이도에 봉착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육아 스테이지를 깨왔지만 음식 카테고리에서 만큼은 여전히 고전하고 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찾긴 하지만 진심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틸만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찾는 것 같아 보인다.
계절마다 돌아오는 '방학'이라는 고수들만이 풀 수 있다는 엄마들의 미션이 떨어졌다. 아침부터 잔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오늘 점심은 뭘로 때워야 하지?
어렵다...
한때는 매일같이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이 즐거울 때가 있었다. 복스럽게 먹어주는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다음에는 또 어떤 맛있는 것을 해줄까 생각하며 설렜었다.
그런 아이들이 내 음식에 맛평가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이 점점 줄어들었다.
아들은 그 어떠한 음식도 맛없게 먹는 고급스킬을 가졌다. 같이 앉아서 밥을 먹고 있자면 입맛을 뚝 떨어지게 한다. 맛있게 먹어주는 게 그렇게 힘든 건가?
먹는 양도 적어서 치킨은 다리 한 조각에 양심상 날개까지 얹어서 먹으면 배부르다고 할 정도다. 밥도 반공기정도 먹고는 다 먹었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삼겹살은 기름져서 느끼하다고 안 먹는 둥, 좋아하던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린다는 둥 먹지 않아도 될 이유가 수십 가지다.
누가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이 라면 세 개는 기본이고 피자 한 판, 치킨 한 마리를 혼자서 다 먹어치우는 괴물이 된다고 하였던가! 우리 집은 점점 먹는 양이 유아 수준으로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힘들게 요리했는데 꾸역꾸역 맛대가리 없게 먹는 걸 보면 기운이 빠져버린다. 그렇게 식탁 위에 올려질 음식의 가짓수는 하나둘씩 줄어들어갔다.
'오늘 뭘 해 먹을까?' 하던 행복한 고민은, 오늘은 또 뭘로 끼니를 때워야 하나... 하는 걱정으로 바뀌어갔다.
때마침 정부에서 지원해 준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들어와서 호불호가 크게 없을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오늘 점심은 폭염에 녹아내릴 것 같은 무더위를 한 방에 날려 줄 냉면이다. 아들도 냉면 먹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버선발로 마중 나가서 받아 온 냉면을 펼쳐놓자 여기저기서 항의가 빗발쳤다.
"비빔냉면 시켰어? 그건 안 먹을 건데..."
"아, 왜 물냉면에 양념장이 들어가 있는 거야? 나는 하얗고 맑은 국물이 좋은데..."
"만두도 시켰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야!"
"응~! 난 만두 안 먹어."
식탁에 앉자마자 녀석들은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본인들의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메뉴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더니 곧이어 이번에도 서로에 대한 비방을 놓치지 않는다.
뱃속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식사시간이 두려움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또 무엇으로 시비를 걸까... 아옹다옹 싸우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설득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예전에는 분명 맛있다고 잘만 먹었던 식당의 냉면인데 그때와 지금은 다른가보다. 꾸역꾸역 혼자서 비빔냉면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세트메뉴에 딸려 온 돈가스 역시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남기면 아까우니 열심히 먹어본다.
식사를 마친 녀석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빈그릇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작 세트메뉴 2인분을 세 명이서 다 먹지도 못했다.
일어나서 치워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꼼짝도 하기 싫었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소중하게 보내던 행복한 식사시간은 망가졌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방에 있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나와서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 거실에는 TV가 없다. 어릴 때 항상 거실에 TV를 켜놓고 각자 가만히 앉아서 화면만 보고 있는 것이 싫었다. 밥 먹을 때 역시 거실에서 들려오는 뉴스소리를 벗 삼아 말없이 밥만 먹는 것이 싫었다.
나는 나중에 커서 절대 거실에 TV를 두지 않을 거란 다짐은 어른이 된 후 지금까지 잘 지키며 살고 있다.
TV를 켜지 않으니 식사시간에도 자연스레 대화가 오가고 꿈에 그리던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은 상상 속에 있을 뿐이다.
아이들이 클수록 대화는 시비가 되고 싸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째... TV를 거실에 놔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면 예능프로그램이 나를 더 즐겁게 해 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밥을 먹지는 않을 테니...
아이들이 언제쯤 감정을 빼고 다시 대화다운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끝을 모르니 답답할 뿐이다.
역시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어김없이 식사시간이 돌아왔다.
오늘 점심은 또 뭘 해 먹어야 하지... 2시간 전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불현듯 학창 시절 친구들과 집에 있는 재료를 학교에 가지고 와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던 것이 생각났다. 무엇이 됐든 각종 재료를 넣고 비벼서 먹으면 그 맛이 꿀맛이다.
뭉그적거리기를 멈추고 주방으로 나갔다.
"점심 뭐 먹어?"
배가 고프긴 한지 인기척에 딸아이가 메뉴를 궁금해했다. 답을 주지 않고 우선 각 방에 있는 아이들을 소집했다.
딸에게 계란프라이를 부탁했다. 아들에게는 먹을 만큼 밥을 양푼에 담고 참치를 넣으라고 했다. 녀석은 바로 나오지 않고 한참을 버티다가 마지못해 나와서 시키는 대로 따라줬다.
냉장고에 곤히 잠들어있는 열무김치와 반찬을 꺼냈다. 아이들에게 김치를 먹기 좋게 자르라고 하고 상추를 뜯어서 넣으라고 했다. 고추장을 반스푼 넣고 마지막에 참기름까지 한 바퀴 두른 뒤 직접 숟가락으로 비벼보라고 했다.
만드는 과정을 모두 함께 했으니 이번엔 맛있게 잘 먹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의 야심 찬 계획은 대실패다!
여전히 새 모이만큼 덜고 배부르다고 하는 아들은 동생과 또다시 쓸데없는 논쟁에 들어갔다. 둘이 떠드느라 밥 먹는 걸 잊어버렸는지 아예 숟가락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분명 먹을 만큼 만들자고 했는데 양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엄마, 엄마는 왜 엄마야?"
"오빠는 왜 오빠야?"
"너는 왜 너야?"
유치한 말들이 오고 갔다. 다행히 오늘의 분위기는 서로 헐뜯고 깎아내리며 나에게 온갖 만행들을 일러바치는 것이 아닌 의미 없는 말들만 허공에 뱉어내는 정도에 그쳤다. 그래도 참지 못하겠는걸!
"그만들 하고 밥 좀 먹자."
"엄마가 밥 먹으라고 하잖아. 오빠는 왜 숟가락 내려놓고 안 먹어?"
"난 지금 산소를 드링킹 하고 있다고!"
하... 아들이 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식사예절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도 찾아서 보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