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사랑해 줘~!

붉은말

by JULIE K

모처럼 엄마모드가 켜진 날이었다.


사소한 것들이 유독 신경 쓰여 딸아이에게 잔소리 폭격기를 날리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은 느닷없이 발을 동동 거리며 렇게 외쳤다.


"아앙~~~! 나 좀 사랑해 줘~!"


당황스러웠다.


다 큰 아이가 갑자기 앙앙대니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나는 순식간에 무장해제됐다. 내 반응이 꽤나 재미있었는지, 그 뒤로 녀석은 마치 유행어처럼 말끝마다 이렇게 덧붙였다.


"나 좀 사랑해 줘~~!"

"나 좀 존중해 줘~~!"

"나 좀 안아 줘, 나 안아!"


웃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문득 마음이 걸렸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요즘 너무 틱틱거렸던 건가.


녀석의 말과 행동은 무의식 중에 했던 나의 말과 행동들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확실한 건, 잔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찰나마다 아이는 저렇게 애교 섞인 말로 정확히 내 말을 칼차단 한다는 사실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도 딸은 달려가 안기며 또다시 말했다.


"나 좀 사랑해 줘~!"


요즘 새로 유행하는 건가. 반복되는 녀석의 동동거림에 어색한 공기는 금세 깨졌고 집안은 웃음바다가 됐다. 그러다 아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엄마, 요즘 내가 아빠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달려가서 안아주잖아. 몇 번 그렇게 하면 다음엔 아빠가 나를 먼저 안아주게 된다?"


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번개처럼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바로 며칠 전, 학교에 가는 딸아이를 배웅하며 꼭 안아던 내 모습.


녀석은… 생각보다 훨씬 고단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퇴근하고 들어온 남편이 갑자기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안 보고 싶었어?"


응?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고?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와 아들은 안중에도 없고, 딸과 남편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인사를 나눴다.


"왜 전화를 안 해?"


남편이 다시 말했다.


그 한마디에 딸아이는 배꼽을 잡고 까르르 웃어댔다. 매일 퇴근길에 전화를 걸어 "아빠, 어디야?"하고 묻던 딸이 전화를 하지 않자, 남편이 괜히 궁금해졌던 것이다.


느닷없이 애틋한 상봉을 마친 뒤 남편은 옷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들어갔고, 딸아이는 내게 속삭였다.


"사람은 루틴이란 게 생겨. 아빠 봐봐. 내가 계속 안아주니까 오늘은 아빠가 먼저 안아줬잖아. 습관이 된 거야."


실험에 성공한 녀석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꼬마는 다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녀석은 요즘,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연습하고 있다.



"돈 받자마자 또 뭘 사 먹은 거야?"


학교에서 하는 방과 후 수업이 끝났다는 연락이 오자마자 카드 결제 알림이 울렸다.


바로 사 먹었군.


어젯밤 녀석이 정성스레 내 발마사지를 해주고 용돈을 받아갔데, 고새를 못 참고 다음날 바로 써버린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잔소리를 하려는데 딸아이가 가방에서 빼빼로를 꺼내 내게 건넸다.


"자, 이거 엄마 거야. 내 거 안 사고 엄마 거 샀어."


무심하게 건네는 녀석의 두 뺨은 빨갛게 얼어 있었다.


"어머, 이거 진짜 엄마 주려고 샀어? 아고, 내 새끼... 엄마 눈물 날 거 같아!"


딸아이를 와락 안아주고 볼에 뽀뽀를 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피부가 딴딴했다.


"아침에 엄마 말 안 듣고 나온 게 걸려서 샀어."


"고마워. 잘 먹을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줬다는 게 고마웠다. 그런데 차마 바로 먹을 수는 없을 거 같았다.


"이따 집에 와서 같이 먹자."


"아니야,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배고프고 힘든데, 그때 간식 먹는 게 즐겁다고 했잖아. 그러라고 일부러 산 거야. 엄마 혼자 다~ 먹어."


이런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엄마 챙기는 건 딸 밖에 없지?"하고 배시시 웃는 녀석의 얼굴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조용히 내 앞을 스르륵 지나가며 녀석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떡볶이가 먹고 싶네..."


그럼 그렇지.


녀석의 잔머리는 상당한 수준다. 결국 딸은 내게 빼빼로를 사주고, 나는 딸에게 떡볶이를 줬다. 하하하!


막내라고 늘 어리게만 봐왔던 꼬마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눈부시게 자라고 있었다.


붉은 말띠 해를 맞은 청마의 기운이, 이제야 제 빛을 내기 시작한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먼저 움직이게 만드는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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