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버리로 향하는 860번 버스가 저 멀리서 들어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버스여행을 하는 중이지만 여전히 버스 타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이번엔 또 어떤 곳으로 데려다줄까?'
마지막 마을로 향하는 버스는 신나게 시골길을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덜컹거리는 버스와 함께 몸도 흔들거리고 있다. 어느새 사람들이 다 내리고 버스 안에는 나 홀로 남아있었다. 혼자인 것을 신경 쓸 겨를 없이 내려야 할 역에 초집중하고 있었다.
'어? 사진에서 본 호텔이다!'
목적지에 다 온 것을 확인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버스는좁다란 길목에 정차했다.내리려고 문 앞으로 걸어가는데 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이봐요. 한 시간 뒤에 내가 다시 여기로 올 거니까 그때까지 반드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서 나가는 마지막 버스라오~! 잊지 마요. 5시 전까지 와있어야 해!"
"네~ 꼭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요~!"
혹여나 내가 마지막 버스를 놓칠까 봐 신신당부하신 아저씨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저씨는 호탕한 웃음을 남기며 출발했다.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며 홀로 남겨진 이 장면이 어디서 본 듯 익숙했다.
해 질 무렵, 부드러웠던 공기는 다시 차가워졌다. 살면서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셔 본 적이 있던가? 순도 100%의 공기가 몸속 가득 들어왔다. 짙은 풀향기가 주위를 에워쌌다.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경쾌하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봤던 호텔로 다가갔다. 원래 묵으려고 했던 곳이었다. 이동동선을 최선으로 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버튼 온 더 워터'에 숙소를 잡았다. 실제로 와서 보니 여기서 하루를 보냈어도 괜찮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호텔을 열심히 눈에 담고 천천히 마을로 향했다. 길 오른쪽에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걷는 내내 물소리가 들려와서 외롭지 않았다. 늦은 오후의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랑곳 않고 씩씩하게 걸어본다. 손에 들려있는 카메라에 의지하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담아나갔다. 이번엔 조금 더 차분한 색감의 집들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다!
사진에서만 봤던 '동화 속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아름다운 이 한 장면을 보기 위해먼 길을 달려왔다.가슴이 벅차올랐다. 완연하게 이 거리에서 혼자인 나는 마치 동화책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마법의 길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창가에는 작은 도자기 인형들이 놓여있었다.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향한 작은 배려로 느껴졌다. 따뜻한 집안의 공기, 향긋한 홍차, 체크무늬 담요가 놓인 흔들의자, 도란도란 얘기소리.. 무한으로 생성되는 나만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극비수기 여행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내가 아닐까?
아름다운 풍경을 독식한 나는 풍족해진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또 다른 거리를 기웃거렸다. 문이 열려있는 한 가게로 들어갔다. 조금 전에 보았던 작은 마을이 그림에 담겨서 저마다 다른 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다가 내가 찍은 사진과 같은 구도의 그림을 집어 들었다. 뒷면에는 작가의 사인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얻어서 흡족해진 나는 버스기사 아저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남은 시간은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송어양식장(Bibury Trout Farm)'에서 보낼 생각이다.
다행히 마감시간 전이라서 입장이 가능했다. 어차피 내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 없었기에 빠르게 둘러보고 나오겠다고 했다. 주인아저씨는 물고기밥을 슬며시 쥐어 주며 내게 30분의 시간을 허락했다. 감사의 인사와 함께 양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아무도 없는 이곳은 꽤나 적막했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아 주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홀로 걷고 있는 양식장은보다 더 시골스럽고 아름다웠지만 생각보다 재미는 없었다.문득 해맑게 웃고 있는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뛰어오르는 송어를 보고 기뻐하며 함박웃음 짓는 아들은 지금 옆에 없다.녀석이라면 분명 신나서 물개박수치며 물고기를 구경할 텐데..
아름다운 마을을 전세 냈다고 좋아서 들떠있다가 어둡고 쓸쓸해지니 외롭다고 투덜대는 나도 참.. 주책바가지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버스를 기다렸다.정확한 시간에 버스가 들어왔다. 다시 만난 버스기사 아저씨와 반갑게 인사했다. 한층 어두워진 시골길을 밝게 비추며 버스는 출발했다.
아침 일찍 호기롭게 시작한 버스투어는 늦은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손에는 차가운 샌드위치가 들려있다.
숙소로 돌아가자 주인아주머니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맡겼던 짐을 찾고 배정된 방으로 안내받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고이 접은 수건과 웰컴스낵이 놓여있었다. 아주머니는 간단하게 욕실사용법을 설명해 주고 내려가셨다.
드디어 완벽하게 혼자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자유인가.. 방해받을 일 하나 없는 지금 나는 행복하다. 하루의 피로가 안녕히 가시는 순간이다. 방을 둘러봤다. 꽃무늬의 화려한 침대시트와 커튼이 취향저격이다. 욕실은 화이트톤으로 세련되고 깔끔했다.
샤워부터 하고 미리 사온 샌드위치로 저녁을 대신했다. 하루를 기록하고 정산하고,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도 정리했다. 온전한 휴식의 마무리는 TV시청이다.
오랜만에 TV를 틀어봤다.
예전에 즐겨보던 '빅브라더'가 생각났다. 친구들과 TV앞에 모여 앉아서 즐겁게 보던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의 개방적인 가치관에 충격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빠져들었었다.
요즘에는 재밌는 게 뭐가 있을까.. 여유롭게 채널을 돌리다가 나체로 집안을 돌아다니는 할아버지가 화면에 나온 것을 본 순간 '아.. 영국에 왔구나..' 하고 다시 한번 실감했다.거침없는 자유분방함은 여전했다.
다시 채널을 돌리니 '심슨'이 나왔다. 영국에서 보는 심슨이라.. 꽤나 신선하다. TV시청도 잠시 노곤해진 몸은 모처럼 찾아온 한가한 밤을 이기지 못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Bourton on the water
정말 신기한 것은 아무리 피곤해도 늘 같은 시간에 눈이 떠진다는 것이다. 나는 왜 늦잠을 자지 못하는가.. 아직도 시차적응 중이란 말인가?!
커튼을 열자 어슴푸레한 빛이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창밖 풍경은 평화롭다. 매연하나 없는 아침 공기를 원 없이 마셔본다. 움직이기 귀찮다는 생각과 달리 나의 육체는 이미 사부작사부작 짐정리를 하고 있다. 짐을 풀고 다시 싸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벌써 와서 한창 식사 중에 있었다. 배고픈 마음에 메뉴판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재빨리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음식을 받아 보고 당황한 눈동자는 갈 곳을 잃었다. 영국식 아침식사는 기본으로 나오고, 사이드 메뉴를 선택하는 것으로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신선한 샐러드와 소시지, 잘 익힌 토마토와 반숙계란, 버섯, 베이컨까지.. 다양한 음식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씁쓸하지만 버터를 듬뿍 바른 토스트 위에 상큼한 마멀레이드잼도 한 스푼 얹어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샐러드와 에그스크램블, 오렌지주스면 충분하다. 기대와 다른 메뉴였지만 맛있게 먹었다.
급할 거 하나 없는 아침이다. 충분한 휴식시간을 갖자는 생각과 달리 역시나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몸뚱이가 먼저 움직인다. 대체 왜! 이토록 푹신한 침대에서느긋하고 편안히 쉬지 못하는가!
순식간에 외출준비를 마친 뒤 캐리어를 맡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나의 두 발은 이미 산책 나갈 준비가 되었다.그 첫발을 내디뎌본다.
강을 따라서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저마다 분주히 아침을 맞이하는 모습이 생동감 넘친다. 오늘도 활기차게 흐르는 강을 따라 걷다가 인상 깊은 장면을 보았다. 한 남자가 다리 위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되려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낭만적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한참을 걸어서 내려가니 왼쪽에 'Footpath'라고 적혀있는 오솔길이 나왔다. 항상 본능은 이성을 앞서간다. 생각하고 판단할 겨를도 없이 이미 산책길로 들어섰다. 드넓은 평야엔 안개가 자욱하게깔려 있었다. 영국 고전영화에서 봤을 법한 장면이다. 울타리 너머 저 멀리 외로이 서있는 커다란 나무 주위로 양 떼들이 몰려서 풀을 뜯고 있었다. 신비로운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본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뿌연 연기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은 남자가 목줄을 채운 커다란 개와 걸어오고 있었다.
낭만이 호러로 바뀌는 순간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안갯속에 가려진 길의 끝이 어디쯤인지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도 좋지만 안전이 우선이기에 왔던 길을 되돌아서 나갔다.
조금 전의 상황을 곱씹어 보니 어처구니없는 웃음만 나왔다. 그 남자는 그냥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분위기에 휩싸여 혼자 공포를 느낀 것이다. 하필 어두운 분위기에 검은색 우비라니..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있어서 충분히 오해할만한 분위기였지만 섣불리 생각한 것이 괜히 미안했다. 물론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감정이었을지라도..
산책길을 빠져나와서 다시 마을로 향하던 중 'The Model Village'라고 쓰여있는 간판을 봤다. 호기심에 들어간 곳에는 버튼 온 더 워터의 축소판, '미니어처 마을'이 있었다. 그보다 더 반가운 건 비로소 나타난 관광객들이다. 조금 전과 180도 다른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햇살 가득한 작은 마을을 둘러봤다.
현재 마을과 흡사하게 만들어 놓은 미니어처의 디테일이 뛰어났다. 클로즈업해서 사진을 찍어봤다.쓸데없는 예술혼을 발휘하며 한참을 사진 찍는데 집중했다. 시간이 정말 잘 갔다. 만족스러운 '관광'을 마치고 다시 마을 중심가로 향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작디작은 마을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이미 상점들은 다 둘러봤기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강 위의 다리를 건너며 어디를 갈지 고민하던 중 어제 지나치면서 본 Cotswold Perfumery에서 투어신청을 받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 입장료는 나가지만 한번 체험해 보자.
다시 할 일이 찾은 나는 생기를 찾았다. 다행히 30분 뒤에 시작하는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예약해 놓고 남은 시간 동안 새로운 길로 동네탐방을 시작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시골풍경이 정겹다. 지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장면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어느 틈에 정든 집들, 바람에 휘날리는유니언잭 깃발, 드넓게 펼쳐진 초원.. 보이는 것들을 눈에 담았다.
아침부터 이어진 오늘의 하루는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레 흘러왔다.
낯선 산책길도 걸어보고(비록 혼자 공포영화를 찍긴 했지만) 우연히 미니어처 마을도 구경하고 이제 향수박물관 투어만이 남았.. 아차! 그러고 보니 예약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생각에 빠져서 걷다 보니 많이도 걸어왔구나!
부지런히 달려서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와 함께 투어를 시작했다. 먼저 1층 정원에서 허브를 구경했다. 작지만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2층에 올라가니다양한 향수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안쪽에서 향수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들으며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너무 많은 향들이 섞여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돌아가면서 시향도 했는데 도무지 무슨 향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실험실을 견학했다. 진한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문득 어제 사이렌세스터에서 우연히 맡았던 꽃향기가 떠올랐다. 아무리 유기농으로 만든다 하지만 자연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드디어 투어를 마치고 나왔다. 바깥공기가 이렇게 상쾌할 줄이야~!향기로부터 해방된 나는 오며 가며 미리 봐두었던 식당으로 갔다.
야외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다. 바로 앞에는 빨간색 공중전화부스가흐르는 강물과 어우러져서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다 타버린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제외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한정적이었던 탓에 무난한 것을 골랐는데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패티가 타버렸다. 난감하다.
여행에서 먹는 것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끼 정도야 대충 때우더라도 보는 눈이 즐겁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그, 그래.. 지금 눈앞에 경치가 예쁘니까.. 이것으로 되었지..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뭔가에 쫓기듯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일상의 날들이 여행이라는 커다란 장벽에 부딪혀서 멈춰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시간이 어색하지만 급하게 서두를 일 하나 없는 여유로움과 금쪽같은지금을 가만히 즐겨본다.
정들었던 마을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동화같이 예쁜 마을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 잊지 못할 추억 한 페이지를 만들었다. 다음 여행지에서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떼고 다음 목적지인 '바스'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