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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K Aug 23. 2024

여행 속 또 다른 여행

Bath / Bristol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됐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까? 특별 정해진 일정이 없기에 무작정 숙소를 나다.


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답게 거리의 이 깔끔하고 단정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건물들과 전혀 다른 모습인 조지안양식의 건축물들이 인상적이다. 베이지톤의 건물색이 통일감을 줬다. 작은 도시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서 한참을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혼자 여행 왔나요?"


부리부리한 큰 눈이 인상적이다. 엉겁결에 대답했다.


"네.. 혼자 여행 중이에요."


"나는 여기서 공부하고 있어요. 바스(Bath)는 참 아름다운 곳이죠. 아! 나는 잭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저는 줄리요. 반가워요."


아침부터 낯선 이와의 대화가 자연스럽다.


"혹시 브리스톨 가보셨나요?"


"아니요. 들어보긴 한 거 같은 데 가보지는 않았어요."


"시간이 되면 꼭 가보세요. 정말 매력이 넘치는 곳이에요."


여행 중에 우연히 얻게 되는 정보는 소중하다. 더군다나 현지인의 정보는 정확하니 믿을만한 소식통이다. 남자는 조금만 더 가면 멋진 다리가 나온다고 알려주고 가던 길을 갔다. 혼자 여행 와서 유난히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일이 많아졌다.


런던에서라면 어땠을까? 다양한 인종이 모여는 복잡한 도시에서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거리엔 바쁘게 사는 사람들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면 도시의 모습은 어디를 가나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작은 도시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이 더욱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지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중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잭이 말한 큰 다리(Pulteney Bridge)가 나왔다. '버튼 온 더 워터'에서 봤던 잔잔한 강물과 다른 제법 규모가 큰 강물이 세차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봤다. 누군가 놓고 간 하얀색 안전모 세 개가 나란히 다리 위에 놓여 있었다. 침햇살에 구슬처럼 반짝이는 동그란 안전모가 귀엽다.


기분 좋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꽃이 피면 더 예쁠 거 같다. 어디를 갈까.. 천천히 걷다가 버스정류장을 발견했다. 몇 번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지나가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날씨가 참 사랑스럽지요?"


"네~ 이젠 정말 봄이 온 거 같아요."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브라이튼에서 지낼 때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꼭 날씨얘기를 하며 말을 걸어오는 할머니들이 계셨다. 'Lovely'를 애정하는 사랑스러운 그녀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한쪽 귀퉁이에 투어버스 안내도가 적혀 있었다. 흠.. 버스를 타면 오늘 하루 만에 이곳을 다 둘러볼 수 있다. 아주 편안하게.. 그런데 오늘 동네를 다 구경해 버리면 내일은 뭘 해야 하지? 게다가 20파운드가 넘는 금액도 무시 못했다.


투어버스 대신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타운으로 향했다.



시대를 거스른
Roman Bath


오늘의 첫 여행지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로만바스'다.


티켓을 구매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목욕탕 냄새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으로 나가니 대한 온천탕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온천수라 그런지 물색깔이 특이했다.


고대로마의 공중목욕탕이라니! 


살아 숨 쉬는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곳곳에 세워진 조각상들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좀 더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다. 얀색 고대로마 복장 고 허리춤에는 황금색 허리띠를 두른 사람들이 탕 주변에 서 있어서 더욱 체적으로 와닿았다.


으로 들어가면 작은 규모의 물관에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소중한 보물들이 세상밖으로 나와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한다. 지금 우리의 일상도 먼 미래의 역사가 되겠지? 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달으며 마지막 종착지인 기념품가게로 들어다. 알 수 없는 철 냄새가 진동했다. 온천수의 냄새가 이렇게 지독할 줄이야.. 구경이고 뭐고 견디기 힘들어서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날씨가 엄청 좋다. 지금까지 우중충했던 하늘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걷기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번엔 문학의 발자취를 따라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을 찾아 떠났다.


국인들이 사랑하는 그녀의 작품은 이미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는 그녀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을 오마주해서 만든 영화로 유명하고, 실제 남자주인공 역할은 BBC드라마 오만과 편견에 나왔던 콜린 퍼스(Colin Firth)또다시 맡아서 화가 되었었다.


그녀의 작품을 책 보다 미디어로 먼저 접한 나는 DVD를 사서 수없이 돌려봤다. 여성의 시선으로 관찰하며 그린 작품은 보다 섬세하고 날카롭지만 위트가 넘친다.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천재적인 작가를 지금 만나러 다. 부푼 기대를 안고 거리를 걸었다.


버스킹 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활기찼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제인 오스틴 센터(The Jane Austen Centre)'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집 앞에 서 있는 파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본 순간 멈칫했다. 생가도 아니고 잠시 살았던 집에 박물관을 만들어 놓았는데 과연 안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비싼 입장료를 내고 볼만한 가치가 있을까?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길목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안으로 들어가고 싶 마음이 사라졌다. 푼 기대감이 현실에 부딪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대충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떠올린 곳은 잭이 말해준 '브리스톨'이었다. 순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동안 광활한 대자연과 정적인 작은 마을에서만 지내다 보니 관광지가 아닌 북적북적한 도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브리스톨이 궁금해졌다. 바스가 싫어진 것 아니다. 다만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다.


그래, 브리스톨로 가자!


여행 속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됐다.



즉흥 여행
Bristol


브리스톨로 가는 가장 빠른 기차표를 샀다. 다행히 10분 뒤에 열차가 도착한다. Bath Spa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이 눈에 밟혔다. 늘 계획대로 여행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처음으로 일정표에서 일탈하는 중이다.


이렇게 통쾌할 줄이야!


무언가에 억압받는 삶을 살지는 않지만 가사와 육아라는 반복되는 일상에 짓눌려왔던 자유로운 영혼이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나와서 활개치고 있는 중이다. 잔뜩 들뜬 마음은 나를 순식간에 브리스톨로 간에 데려다주었다.


...


에서 5분째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중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한 관광지에 있었는데 낯선 도 한가운데 뚝 떨어졌다. 무작정 떠나오기는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집중하자!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어디라도 가면 되지!


용기 내서 역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음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어쩔 줄 몰라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갔다. 갈피를 못 잡는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있다. 역시 즉흥여행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나를 제외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빠르게 감기를 하고 있는 필름처럼 보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정표를 살펴봤다. Harbour라고 쓰여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본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고층빌딩이 도시에 왔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점심시간대라 그런지 직장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다리 위에 모여 앉아서 햇빛고 있었다. 생경한 모습이 신기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틈에 나 홀로 한가로이 여유를 부리는 베짱이가 된 기분이다.


자~~ 이제 택의 기로에 서 있는 나는 이제부터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한다.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왼쪽으로 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단 가보고 별 없으면 되돌아오면 되지 뭐.. 그렇게 긍정회로를 켜고 기 시작했다. 큰길을 건너자 또 다른 분위기의 길이 펼쳐졌다. 강을 끼고 있는 야외석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였다.


다리를 건너자 지도 한 장 없이 다니는 내게 선물과도 같은 정표를 만났다. 커다랗게 그려진 지도가 반갑게 맞이했다. 자석에 이끌린 듯 신이 나서 달려갔다. '캐슬 파크(Castle Park)'라고 적혀있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그곳으로 가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나무 아래 벤치가 부드러운 봄햇살을 받아 빛을 낸다. 른 잔디 위에는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봄소풍을 떠나 온 기분이 들었다.


여유로운 풍경 속에 커다란 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성은 무슨 성일까?' 


즉석에서 떠나왔기에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하랴.. 딱 봐도 오랜 역사를 간직한 풍채가 묵직해 보지 않은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과거를 간직한 의문스러운 성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탄을 자아냈다. 시간여행에 빠져있는 것도 잠시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쇼핑몰로 향했다.


'Cabot Circus'


생각보다 규모가 큰 쇼핑몰은 내가 도심 속에 서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줬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도시의 향기..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니 비로소 생기가 돌며 활력이 생겼다. 자연이 아름다웠지 고요하기만 했던 지난 여행지와 전혀 다른 분위기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익숙한 브랜드의 간판들이 줄을 이었다. 독특한 모양의 지붕이 건물들을 감싸고 있었다. 길 끝에서 만난 작은 광장에서는 검은색 중절모를 쓴 남자가 커다란 비눗방울을 만들며 사람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꼬마 아이가 비눗방울 속에 쏙 들어가자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잠시 구경했다. 


모두가 행복한 오후를 즐기는 모습이 평화롭다.


그들의 기쁨을 잠시 나눠가질 수 있어 오랜만에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갖는 혼자만의 시간을 나름 알차게 잘 보내고 있는 중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떠나온 즉흥여행.. 그 처음이 브리스톨이어서 좋다.


이제 바스로 돌아갈 시간이다.


흥겨움에 콧노래가 절로 난다. 진한 주황빛깔의 석양을 한껏 머금은 브리스톨 기차역의 모습이 아름답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낸 것에 대한 따뜻한 격려로 느껴졌다.


문득 즉흥여행이 우리 인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이 앞서도 괜찮다. 용기 내서 한 발짝만 내딛으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길을 잘못 들어도 상관없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빙 돌아가면 그만이다. 모든 길은 연결되어 있으니 언제든 갈 곳을 다시 찾을 수 있다.


막상 지나오니 별거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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